5장 강백안(2)

by 상재

17.


왜구는 탐라 주변을 집요하게 기웃거렸다.


해안가에는 키보다 높은 성담이 있어서 왜구가 섣불리 들어오진 못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빈틈을 노리며 해안까지 밀고 들어와 위협을 가했다.


김중광 목사는 왜구보단 카치에게 관심이 많았고,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는데 신경을 더 쏟았다.


성주 어른은 그 점을 걱정했다.


최근 왜구는 간혹 말을 태우고 들어왔다.


해안 코지는 바닥이 뾰족해서 말을 내리기 어려웠으나, 해적들은 널빤지를 깔아 문제를 해결했다.


점차 갑옷을 차려입고 활을 무장한 왜구가 눈에 띄었다. 이제 기마까지 끌고 다니니 성주 어른의 걱정이 기우는 아니었다.


나는 성주 어른을 돕기로 결정했다.


백 명의 사병은 전투 경험이 부족해서 따로 훈련을 시켜야 했다.


말이 좋아 사병이지 대부분 소작 하던 농민들이었다. 먹고 살기 어려워 스스로 노비가 되기를 자청해 성주전에 머물던 사람도 있었다.


백 명이나 되는 어설픈 사병을 나 홀로 훈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조용히 지내던 강백안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강 아저씨의 가신 중에는 백병전 경험이 풍부한 장수가 많았다.


탐라에서 강남에 이르기까지 왜구가 출몰하지 않는 바다가 없었고, 항상 전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강 아저씨는 가급적 왜구와 협상하여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지만 일이 늘 좋게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강 아저씨의 가신은 출신성분이 다양했다. 몽골족은 물론, 한족(漢族)과 월족(越族)도 있었다.


다들 활과 칼을 잘 써서 왜구들도 어지간한 숫자가 아니면 강 아저씨에게 함부로 시비 걸지 않았다.


강 아저씨가 왜구로부터 해로를 안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심만삼 대인이 마음 놓고 탐라까지 진출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강 아저씨는 사병 훈련에 사람 내어주기를 주저했다. 김중광 목사에게 트집이라도 잡힐까 두렵다고 말했다.


나는 아저씨를 열심히 설득했다. 김 목사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 왜구를 대비하는 걸 두고 이상하게 곡해할 사람이 아니다 강변했다.


강 아저씨는 고민 끝에 말했다.


“나의 가신 중에 몽골 출신의 명궁이 있다. 활을 겨루어 이기면 도와주마.”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몽골 출신의 명궁이라기에 조금 긴장되었다.


석 삼촌은 몽골에 자신처럼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었다.


사실 아버지도 그렇고, 초 삼촌과 관 삼촌도 활을 잘 쏘았다. 그래서 어릴 적 나는 항상 삼촌들을 이기려고 애를 썼다.


이제는 삼촌들과 겨루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강 아저씨의 가신이 나보다 뛰어날지도 몰랐다.


강 아저씨가 불러온 가신은 한눈에 보기에도 숱한 전투를 겪은 것처럼 보였다. 볼과 입 사이에 기다란 칼자국이 있었고, 손 마디마다 굳은살이 가득했다.


가신은 자신을 차쿠르라고 소개했다.


그는 어린 나를 두고도 무시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신중했다.


게다가 그의 활은 물소뿔로 만든 흑각궁(黑角弓)이었다. 습한 탐라의 땅에서 잘 관리된 흑각궁을 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다.


물소뿔은 귀하기도 하지만, 습한 탐라의 환경에서 견디지 못하고 쉽게 떨어졌다.


차쿠르 아저씨가 각궁을 얼마나 아끼고 세심히 관리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죽을 것은 없었다. 내가 직접 사슴뿔로 만든 녹각궁(鹿角弓)도 매우 훌륭한 활이다.


사슴뿔은 속이 꽉 차있어서 다듬기 어려웠지만, 성능은 흑각궁에 비견할 만했다.


차쿠르 아저씨의 시위가 튕기고, 화살은 백 보 밖의 나무에 가서 박혔다.


나는 곧바로 녹각궁의 시위를 당겨 바로 놓았다. 같은 자리에 내 화살이 박히자, 그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다시 시위를 당겨 백오십 보나 떨어진 나무에 화살을 박았다. 나는 이번에도 지체하지 않고 시위를 당겨 같은 곳을 맞혔다.


차쿠르 아저씨는 다시 시위를 당겨 이백 보 거리에 화살을 쏘았다.


이 거리는 쏘아 보낼 순 있어도, 바람 때문에 표적을 정확히 맞히기가 힘들었다.


나는 눈으로 흔들리는 잎사귀를 보고 귀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신중하게 시위를 놓았다.


마침내 화살이 그가 쏜 곳과 같은 곳에 박히자, 그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어르신, 저는 이백 보 거리를 쏘아 보낼 순 있어도, 표적을 정확히 맞추지는 못합니다. 이 아이는 제가 아무렇게나 쏜 이백 보 거리의 표적을 맞혔으니, 저보다 실력이 월등합니다. 문 만호의 아들답습니다.”


차쿠르 아저씨는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눈으로 인사했다.


방금 본 사이였지만 활을 겨루었더니 뭔가 모를 친근감이 생겨났다.


강 아저씨는 차쿠르 아저씨더러 사병 훈련을 도와주라고 일렀다.


그리고 내게 당부했다. 김중광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라. 지금 그자는 매우 예민하단다.


나는 알았다 대답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김중광은 그저 탐라의 관습을 없애고 고려의 질서를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말이 옳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얻는 길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차쿠르 아저씨와 함께 사병 훈련에 나섰다.


나는 석 삼촌에게 배운 마상 전투와 초 삼촌이 알려준 기마전술, 관 삼촌에게 배운 씨름을 가르쳤다.


차쿠르 아저씨의 역할은 사병의 군기를 관리하고 실전과도 같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굴리는 것이었다.


사병 훈련에 가장 애를 먹은 것은 다름 아닌 기마전술이었다.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갖자지 신호를 알아야 했다.


보통 입으로 소리를 내는데, 돌격과 좌우 선회, 속도 조절 등 수십 가지 신호가 있었다.


내가 선두에서 소리로 신호를 보내면 뒷줄까지 전해져야 했다.


사병들은 다양한 신호를 쉽게 구분하지 못했다. 뒷줄에 가면 신호가 이상하게 왜곡되어 전해졌다.


아직 기마 돌격조차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말 위에서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신호에 집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말발굽 소리가 커서 신호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다.


이 모든 것을 익히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지만, 왜구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었기에 고민이 많아졌다.


그때 차쿠르 아저씨가 묘안을 내었다. 당장 급한 신호 몇 가지만 추려서 쉽게 구분할 수 있게 소리를 내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좋은 방법이어서, 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였는지 모자란 나를 질책했다.


차쿠르 아저씨는 껄껄 웃으며 실전 경험의 차이라고 말했다. 너도 크면 생각할 수 있을 거라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차쿠르 아저씨는 나를 신기해하셨다.


너는 나이에 비해 참 많은 걸 알아. 기마 운용과 전술이 뛰어나. 어디서 배웠니?


나는 대답했다. 쿠투부카 삼촌에게 배웠어요.


병법은?


아버지가 알려주셨죠.


씨름도 잘하던데?


관음보 삼촌과 매일 겨뤘어요.


말도 잘 타더라.


그건 데리비스 삼촌이 알려줬어요.


문득 그리운 느낌과 함께 삼촌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삼촌들은 내 안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병들에게 속도를 늦추는 신호와 돌격 신호 두 개만을 구분하여 가르쳤다.


돌격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효과가 있고, 멈추는 것 또한 한 몸처럼 해야 서로 부딪치며 다치는 불상사가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신호만 가르치니 사병들이 쉽게 배웠다. 우선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했다.


차쿠르 아저씨는 기마전을 잘 몰라서 모의 기마전에서 항상 내가 이겼다.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기마 운용과 전술을 상세히 물어보셨고, 나는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수준이 높아져야 사병들의 실력을 빨리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차쿠르 아저씨는 바다에서 왜구와 싸웠던 경험을 들려주곤 하였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말했다. 왜구와 상대할 때는 우두머리를 쳐라. 우두머리가 죽으면 모두 도망간단다.


백병전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차쿠르 아저씨의 몫이었는데, 사병들에게 창칼을 쥐여주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시켰다.


백병전 경험이 쌓이면서 병사들의 자신감이 살아났다. 실력이 올라올수록 나를 긴장시키는 병사도 생겨났다.


그래도 아직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니어서 조바심이 일었다.


나는 사병들에게 아버지에게 배운 활 제조 방법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날이 좋을 때면 사병을 이끌고 중산간 지대를 돌며 노루 뿔을 주웠다.


탐라에는 살대로 쓸만한 대나무가 산천에 가득했다. 눈만 돌리면 꿩이 날았기에 살깃도 수월하게 구했다.


모든 재료가 모이면 쇠심줄로 활을 묶어 엮어 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눈과 손으로 익히게 하였다.


성주 어른은 화살촉만 구하면 되었기에 비용을 아껴 기뻐하셨다.


다만 말이 고작 백 필밖에 준비되지 않아서 걱정이었다.


성주 어른은 어째서 사람 수보다 많은 말이 필요한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성주 어른, 오백 필은 필요해요. 전장에서 말은 빨리 지치고 많이 다칩니다. 석 삼촌이 말했어요. 기병 하나에 말 다섯은 필요하다고요. 기마는 돌격하고 나면 교체해야 하는데, 바꿔 탈 말이 없다니요?”


“고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구나. 기마를 오백 필이나 마련한다면 틀림없이 경계하고 눈독을 들일 것이다. 백 필도 겨우 맞췄다.”


“말을 잃은 기마병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말을 늘릴 수 없다면 기마병을 훈련하나 마나입니다.”


성주 어른은 내 말을 듣고 김중광 목사 설득에 나섰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주 어른이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렸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김중광은 뇌물이 통하는 자가 아니었고, 그의 관심은 온통 카치의 동태에 몰려 있었다.


군마를 늘리겠다는 말만 들어도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중광 목사는 차현유 아저씨가 불태워버린 목관아를 재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장 드러나지 않는 왜구의 위협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왜구의 소란은 점차 빈번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너 척의 작은 규모로 탐라를 기웃거리다가, 기습적으로 상륙을 시도하고 도망가곤 하였다.


나는 그러한 왜구의 행위에 의문을 가졌다.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무언가 의도가 있어 보였다.


차쿠르 아저씨는 반응을 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반응이요?


차쿠를 아저씨는 끄덕였다. 탐라의 대응을 보는 것이지. 틀림없이 정찰이다. 폭풍 전야와 같은 것이다.


나는 차쿠르 아저씨와 상의한 끝에, 김중광 몰래 군마를 늘리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강백안 아저씨가 키우는 양마를 몰래 군마로 훈련시키자는 것이었다.


매일 백 필을 바꿔가면서 훈련한다면,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말 백 필일 뿐이었다.


그러나 강 아저씨는 우리 제안을 매우 꺼렸다. 혹시라도 들통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아저씨, 탐라의 군민을 위해 스스로 목을 내어준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말이에요. 죽는 게 너무 무서워서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요.


저기 한라산 어리목에,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 있어요. 아주 작지요. 왜냐하면 관음보 삼촌의 막내딸이 묻혀 있거든요.


아직 이름도 없는 그 아이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에도, 저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 겁쟁이였으니까.


그런데요 아저씨, 이제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저는 제 삶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어요. 목사가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지키는 겁니다.


그래도 되잖아요. 우린 그럴 수 있잖아요.


강백안 아저씨는 가만히 나를 보았다.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고 덧붙여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김중광 목사는 그저 두렵고 예민할 뿐이니까, 우리가 잘 설명하면 납득할 겁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니까요.


아저씨가 눈을 질끈 감고 침음을 흘렸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강 아저씨는 결국 옳은 선택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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