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고복수(3)

by 상재

3.


산천이 평소와 같이 은은하고 고요했다. 아무래도 왜구가 여기까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건넛마을 쪽으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다.


말발굽 소리에 설핏 깨어 보니 아버지와 삼촌들이 무탈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마중을 나가려다가 어머니 생각이 나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무사하세요.”


어머니는 소식을 듣자마자 팽나무로 달려가 꾸벅 인사를 올리고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했다.


올레 밖이 왁자지껄했다. 나는 돌담으로 올라가 소리쳤다.


“어떻게 됐어요?”


석 삼촌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얼굴에 턱수염을 비벼댔다. 따가워서 밀쳤더니 석 삼촌은 껄껄 웃었다.


“일단 들어가자꾸나. 잘 해결되었어.”


아버지가 마루(돌로 만든 화로)에 불을 피우는 사이 어머니가 상차림을 마쳤다.


이윽고 아버지가 평소 품에 간직하고 다니던 금패를 꺼내었다. 탐라의 만호(萬戶)임을 증명하는 수령패였다.


아버지는 원나라가 직접 임명한 탐라의 만호로서 한때 탐라를 다스리는 수령이었기 때문에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금패를 지니고 계셨다.


하지만 원나라가 망해 북으로 쫓겨나면서 만호부가 폐지되고, 고려에서 직접 목사를 파견한 이후로 좀처럼 금패를 꺼내 보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도 참 오랜만에 구경하는 것이었다.


“어째 애월포를 침구한다 했더니 과연 보통 놈들이 아니었어. 이제껏 봤던 해적과는 근본이 달라. 아마 왜국(倭國)에서 한가락하는 장수였을 게다. 그들이 금패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이렇게 쉽게 끝내지는 못했겠지. 아직 대원(大元)의 군세가 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덕분이야.”


“맞소, 형님. 그들을 구원한 것은 태풍이었지. 가미카제(神風)라던가? 미신 따위나 믿는 놈들이지.”


석 삼촌이 껄껄 웃으며 왜구 무리를 조롱하였다. 그때 평소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관 삼촌이 갑자기 거칠게 말했다.


“목사라는 작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소. 만호 형님, 언제까지 핍박받으며 살 것이오? 숨 좀 쉬면서 삽시다.”


관 삼촌은 얼굴처럼 목소리도 맹수 같았다. 나는 조금 무서워서 석 삼촌 옷자락을 잡았다.


아버지는 딱딱한 얼굴로 관 삼촌을 나무랐다.


“만호부(萬戶府)는 이제 없네. 그러니 나도 만호가 아니다. 음보야, 관음보야, 이 칠칠치 못한 것아. 처자식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계속 그런 태도라면 고려에서 우릴 어찌 보겠느냐?”


초 삼촌이 끼어들어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다스렸다.


“형님, 화내지 마시오. 그리고 음보야, 경거망동 말거라.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만호부를 되찾겠느냐. 원(元)이 무너졌다.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고려의 백성으로 살아야지.”


“쿠투부카 형님! 그러는 고려는 우릴 돌봐주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어허, 그만하래두. 음보야, 몇 해 전까지 원 황제가 대궐을 짓는답시고 우리를 성가시게 만든 일을 잊었는가? 그때 도목수(都木手) 원세는 재목과 인부를 징집하라는 조정의 압박을 받으며 속을 앓다가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우리를 괴롭게 만들 뿐이네.”


관 삼촌은 할 말이 남은 듯 입술을 삐죽이다가 곧 돌아앉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자,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왜구의 일을 물었다. 아버지는 염려 말라는 듯이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소. 오랜 항해로 마실 물이 급했던 모양이오.”


“왜구가 타이른다고 타일러지던가요? 뒤에서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는데.”


“아까 말했듯이 보통 왜구가 아니었소. 병사들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고 군기가 바짝 든 것이 아마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왜국의 무리가 아닐까 싶소.”


“이번엔 물을 찾아 들어왔지만, 다음에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할지 몰라요.”


“바닷길을 어찌 막을 수 있겠소. 그렇지 않아도 걱정되어 차라리 무역을 제안했더니, 흔쾌히 응하더군.”


어찌 되었건 아버지가 일을 훌륭히 수습한 모양이었다.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아버지가 큰일을 해낸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자 관아에서 장정 수십을 이끌고 몰려들었다.


나는 말총을 다듬다 말고 놀라서 아버지를 불렀다. 몰려든 장정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만 보니 장인 할머니들에게서 모자를 뺏어간 목사님이었다.


이용장 목사는 자신의 뒤로 장정을 도열시키고 턱을 치켜들었다.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기가 질렸다.


“전하께서 망국의 카치를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셨는데,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냐?”


아버지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무슨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하여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목사가 재차 다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꿇리지 않고.”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아버지를 맨바닥에 강제로 꿇렸다.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뭐가 뭔지 몰라서 황당한 눈을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셨다.


“탐라는 고려의 영토로써 이곳에서 나는 모든 물산이 전하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왜구와 짜고 물자를 빼돌린단 말이냐!”


나는 그제야 무언가 단단히 꼬여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어제 왜구에게 무역을 제안한 것을 두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곧바로 눈치를 채고 사정을 설명했지만, 이용장 목사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왜구가 침범했으면 관군을 기다리면 되었을 것을, 너희들 마음대로 협상하라고 누가 그러더냐? 아단부카, 네가 아직도 탐라의 만호인 줄 아는구나!”


이용장 목사는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다그쳤다.


아버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수령님!’하고 간절하게 외치며 달려 나갔는데, 아버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급히 말렸다.


“가만히 있거라. 나 혼자 조금 고생하다 오면 될 일이다.”

아버지는 이용장 목사가 데려온 장정들에게 포박당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석 삼촌과 초 삼촌이 급히 달려왔다. 석 삼촌은 대충 이야기를 들었는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 하더냐?”


“가만히 있으랬어요. 조금 고생하고 말 거라면서요.”


“가서 알아보고 오마. 형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데리비스, 어쩌려고?”


“심려 마세요, 형수님. 쿠투부카 형님과 함께 갈 것이니 별일 없을 겁니다. 잘 해결될 겁니다. 맘 편히 쉬고 계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 삼촌과 초 삼촌은 관아를 향해 사라졌다.


삼촌들이 떠난 후 어머니는 어제와 똑같이 사발에 물을 떠 뒷마당 팽나무로 갔다.


이번에는 나도 어머니 옆에서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석 삼촌과 초 삼촌이 아버지를 둘러업고 돌아왔다.


나는 억울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초 삼촌이 등을 토닥였다.


“곤장을 맞으셨다. 당분간 보중하셔야 한다. 바투르, 사내는 함부로 눈물을 보여선 안 돼. 아버지가 누워 있는 동안엔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 부모님을 지켜주렴. 할 수 있겠니?”

눈물을 훔치며 고개만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망건 탕건 할머니를 도와주려던 이야기도 없던 것이 되었다.


마침 아버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온 어머니가 초 삼촌을 불렀다.


“쿠투부카, 오늘은 이렇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이 목사가 나중에 다른 트집을 잡으면 어떡하지? 성주 어른께 상의를 드려야겠어.”


성주 어른은 탐라의 오랜 지배자이자 유력한 토호의 집안이었다.


성주라는 작위는 아주 오래전에 고려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성주 작위를 대대로 물려주면서 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고려에서 목사님이 파견된 후로는 그다지 힘이 없는 듯하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성주 어른을 찾아가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어머니는 아마 그래서 말을 꺼내었을 것인데, 초 삼촌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형수님, 성주를 괴롭히지 맙시다. 성주의 숙부 되시는 전대 성주 고복수가 죽임을 당한 일에는, 만호 형님 말씀처럼 우리 책임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끼리 해결해 봅시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초 삼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었는데요?”


“알 것 없다. 아버지가 회복할 때까지 자중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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