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2년 4월, 탐라가 유경원과 이용장 목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사>> 권43, 공민왕(恭愍王) 21년.
4.
한라산을 뒤덮었던 눈이 사르르 녹아 마른 하천을 적시고 영등할망이 온 섬을 휘돌고 떠나자, 봄꽃이 노랗게 물들었다.
어머니가 차롱에 봄나물을 한가득 담아 올 무렵 활짝 핀 왕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버지는 금방 회복하여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예전처럼 매일 같이 목마장(牧馬場)을 들락거리며 말을 돌보셨다.
다행히 목사님 쪽에서는 이후로 별다른 기색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지만, 관 삼촌은 사나운 얼굴을 더욱 무섭게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벚꽃잎에 날려 보내며 석 삼촌과 함께 말을 달리고 화살 쏘는 일에 집중했다.
벚꽃이 지고 하얀 메밀이 고개를 내밀 즈음이었다. 초지를 한 차례 달린 후 말을 빗기고 있었는데, 이용장 목사가 처음 보는 사람들을 데리고 몸소 목마장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좋지 않은 느낌에 말 틈바구니로 몸을 숨겼다. 처음 보는 남자가 이 목사에게 공손한 자세로 물었다.
“여기가 서아막 목마장이로군요. 그런데 영공, 생각보다 말이 적은데 어찌 된 일입니까?”
“아이고 별감 어른, 이 섬이 작다 하지만 한낱 미물인 말에게는 대국처럼 넓지 않겠소? 평소 사방 천지에 흩어져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니, 말을 기르기 좋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카치에게 명하면 이천 필 정도야 거뜬히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이 목사가 돌아간 후 그들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빼앗으려 한다는 걸 깨닫고 집으로 내달렸다.
“아버지!”
“바투르, 웬 호들갑이냐?”
“목사님이 말을 가져간대요!”
“진정하고, 찬찬히 이야기해 보거라.”
“목사님이 별감이라는 어른과 목마장에 왔었어요. 말 이천 마리를 가져간대요!”
“어마사(御馬使)가 왔구나!”
아버지는 잔뜩 굳은 얼굴로 급히 삼촌들을 불러들였다. 사정을 들은 삼촌들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이천 필이 갑자기 어디서 난단 말입니까? 있지도 않은 말을 내놓으라고 또 무슨 트집을 잡고 괴롭힐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합니다. 이놈들을 당장!”
관 삼촌이 주먹을 불끈 쥐며 분개하는데, 초 삼촌이 말리며 나섰다.
“형님, 이번 일은 아무래도 성주에게 의논을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주 작위가 아무리 허울뿐이래도 아직 위세가 남아있습니다. 어마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오.”
아버지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초 삼촌이 다녀오겠다는 걸 아버지가 말렸다.
“쿠투부카. 자네는 임인년(壬寅年) 거사에 돌아가신 고복수 어른과 함께하지 않았나? 그건 데리비스도 마찬가지지. 성주께서 불편해하실 걸세. 나는 그 일과 관련이 없으니 직접 다녀오겠네.”
아버지는 혼자 성주 어른께 다녀온 뒤로 말이 없어지셨다.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니 뱃속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왜 자꾸 괴롭히는 것일까?
그렇게 시일을 보내는 사이 이용장 목사가 장정들을 이끌고 올레를 질러왔다. 두어 달 전 아버지를 막무가내로 끌고 갔던 때처럼.
“문 만호, 게 있는가?”
어쩐 일인지 목사의 태도가 산뜻했다.
곤장을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아버지 엉덩이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목사는 그때와 다른 사람이라도 된것 마냥 행동하니 더욱 불안해졌다.
아버지도 수상하였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만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영공께서 탐라의 목사와 만호를 겸하고 계시는데, 그런 호칭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버지가 허리를 숙이며 묻자, 목사는 웬일인지 껄껄 웃었다.
“내가 문 만호를 찾을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말을 가지러 왔지.”
“공납(貢納) 입니까?”
“왕명일세. 유지별감(宥旨別監)께서 어마사로 오셨네.”
“얼마나 내어드리면 될까요?”
“이천 필이네.”
아버지는 한숨을 쉬고는, 차분히 말했다.
“영공, 아시겠지만 공납할 만큼 좋은 말은 기백에 불과합니다. 이천 필을 당장 준비할 여력이 없습니다.”
“없다고? 사실인가?”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새삼스레 왜 그러십니까? 평소 뒷마당에 열린 감귤 숫자까지 세어가시면서 말이 몇 필이나 되는지 모르셨습니까?”
“내가 그걸 어찌 알어? 전임자에게 인수 받기를 기천은 될 것이라 하였는데?”
나는 목사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알아챘다. 뻔히 알면서도 없는 말을 내어놓으라는 데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온 장정들 사이로 처음 보는 벼슬아치들이 눈에 띄었다. 틀림없이 별감인지 어마사인지 하는 작자와 함께 내려온 자들이었다.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려 면피하려는 모양인데, 우리로서는 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급히 튀어 나가 목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목사님, 제발 우리를 괴롭히지 마세요. 아버지를 가만 놔두세요.”
“문탐노!”
아버지가 깜짝 놀라 나를 잡아당겼다.
“누가 어른들 말하시는데 끼어들라 가르치든? 방으로 들어가! 어서!”
아버지가 그처럼 무섭게 꾸짖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뭐라 말도 못 하고 얼떨결에 방으로 돌아왔다.
목사가 돌아간 후 아버지는 다시 삼촌들을 불러 모았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내가 듣지 못하도록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하셨다.
불안한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오락가락하여 귀에 손을 모아 마루 쪽으로 기울였지만,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