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년에 탐라의 수령으로 새로 부임한 이용장 목사는 심보가 사나운 사람이었다.
군민들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어찌나 많은지 아버지도 밥을 먹다 말고 한숨을 쉬곤 했다.
그는 설을 쇠기가 무섭게 할머니들 작업장으로 대뜸 쳐들어오더니, 상품을 내어놓으라 호통쳤다.
물건이 완성될 시점을 어찌 알아내어서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기왕 만든 물건은 이미 관아에 납부한 터라 이제 만든 것은 쌀로 바꾸어야 했기에 일 년 먹을 식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내어놓으라고 하니 굶어 죽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어서 할머니들은 굽을 대로 굽은 등을 더욱 굽히며 사정사정했다.
그 틈에 장정들이 초가를 한바탕 휘젓고는 총모자, 탕건, 망건을 찾아 가져와 바쳤다.
할머니들은 자지러질 듯 애원했지만, 이용장 목사는 사정을 봐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목사는 총모자를 보면서 왜 완성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고는, 사정을 알고 망건과 탕건만 가지고 돌아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와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고 서로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나를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용장 목사의 일을 설명하고 할머니들을 도와주자고 넌지시 말했다.
우리도 할머니들에게 말총을 팔아 도움받는 부분이 있었기에 가만 두고 보기가 마음이 쓰였다.
그때 석 삼촌이 다급히 찾아와 아버지를 불렀다. 무척 초조한 기색이어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대충 인사를 드리고 서둘러 방으로 들였더니, 석 삼촌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왜놈들이 왔소. 이번엔 애월포(涯月浦)를 털 모양이오.”
“데리비스, 진정하고 앉게. 애월포는 조정 관리들이 들어오는 길인데 왜놈들이 감히 침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소. 숫자가 심상치 않단 말이오. 이용장 목사가 병사를 움직일 것 같소이까?”
“마땅히 그리하겠지.”
“아이고 형님, 내가 보기에 이용장은 예전 수령들보다 더한 놈이오. 재물에만 관심이 있단 말이오. 과연 그가 나서겠소?”
“예전에는 우리가 고려에서 파견한 수령들에게 죽자고 덤벼들지 않았나? 이제 와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할 것도 없네. 데리비스, 이제 우리는 고려의 백성이 되어야 하네. 이용장 목사를 믿고 기다려 보세나.”
“젠장할, 이 작은 섬나라에 무얼 먹을 것이 있다고 여기저기서 빼앗기 바쁘니 원.”
석 삼촌은 볼멘소리를 하면서 돌아갔다. 왜구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불쌍한 할머니들 이야기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내가 살고 있는 탐라는 섬치고는 꽤 넓어서, 때마다 쳐들어오는 해적들이 언제 어디로 쳐들어올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예전 무슨 전쟁 때 해안가를 따라 길게 쌓아놓은 성담이 있었지만, 미리 알고 대비하지 않은 다음에야 성담을 넘어오는 왜구를 일일이 막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넓은 섬을 빙 돌아가며 꼼꼼하게 방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건넛마을 연대(煙臺)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탐라에 적이 침입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버지는 굳은 얼굴을 하고 석, 초 두 삼촌을 불러들였다.
석 삼촌을 따라 관 삼촌도 함께 왔는데, 관 삼촌은 등치가 둥글게 크고 인상이 사나우며 말수가 적어서 조금 무서웠다.
“아무래도 급히 가봐야겠다. 말을 준비하고 무장을 챙기거라.”
아버지의 말에 관 삼촌의 사나운 얼굴이 희한하게 찌그러졌다. 웃는 것도 같고 짜증 내는 것도 같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삼촌들이 채비하러 흩어지자 나는 아버지를 졸랐다.
“저도 같이 갈래요.”
“네가 낄 일이 아니다. 집에 가만히 있거라.”
“총모자 할머니가 걱정돼요. 할머니를 모시고 몰래 빠져나올게요.”
“이 녀석이! 문탐노! 네 눈에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느냐!”
아버지가 본명을 그것도 성까지 붙여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성을 내는 아버지에게 대꾸를 못하고 입을 다물었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아서 일부러 보라고 볼을 부풀렸다.
사실 할머니가 걱정된다는 말은 핑곗거리에 불과했고, 왜구를 직접 보고 싶은 호기심이 더욱 컸다.
심술이 나 입술을 삐죽 내밀기까지 했더니, 아버지는 돌연 부드럽게 말했다.
“왜구들이 혹시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어쩌니? 바투르, 네가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
“네……..”
막상 어머니 얼굴을 보니 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어머니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 내 손을 꼭 쥐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모두 마을을 나서면 어머니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에게 다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바투르에요, 바투르!”
아버지는 대견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채비를 마친 삼촌들과 함께 말을 달렸다.
어머니는 뭐가 그리 걱정인지 사발에 물을 뜨더니 뒷마당 팽나무 밑에 얌전히 가져다 놓고 손을 모아 빌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어깨가 보기 불편해서 혼자 마을 어귀로 나가 솟아오르는 연기를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