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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09. 2022

침이 고인다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중학생 때 우리 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던 《침이 고인다》를 기억한다.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억측하고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느낌의 공동체》라는 책에서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은 아이들은 너무 우울해서 섬뜩한 어른이 되거나 너무 씩씩해서 보기에 마음 짠한 어른이 된다.'라는 구절과 함께 후자가 '소설가 김애란'이라는 평가를 봤다. '너무 씩씩해서 보기에 마음 짠한 어른'이라니. 그 줄을 읽고,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읊었다. 그 표현이 말하고자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한 번에 감이 왔다. 그리고 주말을 앞두고 도서관으로 향해 이 책을 빌렸다.

 

  《침이 고인다》는 총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그리 경쾌하지만은 않은 분위기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분명 8개의 단편 모두 몰입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 번째 단편 <침이 고인다>.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광호 해설가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타인의 깊은 외상적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타인과 깊은 소통과 유대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외상적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는 책무감, 혹은 자신도 그 사람에게 그런 외상적 기억을 말해야 한다는 부채감이 작동할 것이다.

 

  친구 A가 내게 말했다.

  "나는 내가 나를 감당하기도 벅차서 누군가 내게 기대려고 하는 게 보이면 피하게 돼."

  내가 말했다.

  "네가 이상하거나 잘못된 게 아니야. 누구나 휘청거리는 사람에게 눈길을 줄 수는 있어도 아예 중심을 잃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란 쉽지 않은 거야."

 

  해설의 저 부분을 읽는데, A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누가 이런 문구를 모르겠는가.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해내는 것이 어려운 것일 뿐.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마저 이제는 '대단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을 숨김으로써 방어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방어하기도 한다고.

 

  내 생각에 자신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신을 숨기는 사람도 결국 다 드러나기 마련이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드러내 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쉽사리 누구는 잘 드러나서 좋고, 잘 드러나지 않아 싫다고 못하겠다.

  서로 방법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일 테니까.

 

  여섯 번째 단편 <기도>.

  언니가 내 머리통을 친다. 나는 껄렁껄렁 언니를 따른다. 언니는 내게 자꾸 이야기해주려 한다. 아마 내가 그런 생소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고 생각해서이리라. 언니는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뭔가 주는 걸 좋아했다. 필요하다 싶으면 사서 줬고, 살 수 없을 땐 자신이 갖고 있는 매니큐어나 색조 화장품 따위를 줬다. 최근에도 내 방에 찾아와 수만 가지 잔소리를 하며 냉장고 청소도 해주고, 오랫동안 방치해둔 싱크대 문짝도 달아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줄 게 없자 내게 '이야기'를 주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는데 눈물이 났다. 언니는 나한테 참 애틋한 사람이다. 우리 언니가 딱 단편 속 저런 언니와 같다. 어려서부터 '장녀' 노릇을 해왔고, 어디를 가도 '맏이' 티가 풀풀 나는 그런 사람. 7살 때부터 밥을 짓기 시작하고, 동생들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집안의 무슨 일이 있든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

 

  화자 속 언니처럼 우리 언니도 지금까지 내게 '아낌없이 주는' 존재다. 바쁘신 어머니를 대신해 내 도시락을 만들어줬고, 부모님도 안 챙기는 크리스마스에 오빠랑 돈을 모아 남동생과 나의 선물을 마련하고, 자기 물건 살 때 내 것도 빼놓지 않고 챙기고, 시험 기간마다 힘내라고 배스킨라빈스를 사다 주고, 헛웃음 나는 내 장난에도 기꺼이 대꾸해준다.

 

  언니가 중학생일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언니는 야자를 했고, 나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언니가 돌아올 쯤이면 집 담벼락에 앉아 있거나 골목까지 나가면 있는 버스 정류소에서 언니를 기다렸다. 언니를 기다리던 겨울밤의 코 끝의 온도가 아직도 차다. 시골이라서 별이 총총 있었지만, 꽤 어두웠다. 가로등은 왜 그렇게 듬성듬성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겁이 났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언니를 마중 나가는 건 내 일과의 마지막 임무였다. 나를 보면 멀리서부터 언니는 걸음을 빨리 하며 내게 왔다. "왜 나와있어?"라고 물으며 나를 한 번 따뜻하게 안아준다. 그리고 차가워진 내 손을 언니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줬다. 분명 여름에도 언니를 기다렸을 텐데 나는 '별이 총총 빛나던 밤, 언니가 총총 뛰어오던 모습'만 생각난다.

 

  언니랑 나는 같은 방에서 쭉 지내왔다. 그러다가 언니가 시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여전히 무언가를 안고 자는 게 익숙했었다.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 첫 버스를 타고 언니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는 이불을 살짝 걷어 몸을 뺀 후 나갈 준비를 한다. 방문을 나서기 전 언니는 꼭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다시 한번 바르게 얼굴 바로 아래까지 덮어주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집 앞 대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눈을 뜬다. 언니가 이불을 살짝 드는 순간부터 사실 잠은 싹 사라졌다. 그래도 눈을 뜰 수 없었다. 지금 눈을 뜨면 언니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니까. 이번 주말이면 다시 언니와 오빠가 우리 집으로 올 테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을 생각할 정도로 나는 이성적이지 못했다.

 

  언니랑 나랑 성향이 비슷하지는 않지만, 나한테 언니는 애틋하다. 왜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 속에서 언니가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해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언니가 아니었더라면 몰랐을 모든 것들을 우리 언니는 너무 당연하게 내게 건네줬다. 생색 한 번 없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부모님이나 오빠, 남동생과는 또 다른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부모의 은혜도, 스승의 은혜도, 끝이 없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언니에게 갚을 은혜도 끝이 없다.

 

  <기도>라는 단편을 보면서 언니가 힘들 때 모르는 척 언니에게 돈을 쥐어주고도 싶어 졌고, 화자 속 언니가 아끼는 베개와 같은 물건이 언니에게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직장인이 된다면 첫 월급으로 언니에게는 내복이 아니라 색색깔의 양말을 사서 양말함을 가득 채운 후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 우리는 언니는 양말에 포인트를 주는 패셔니스타니까!

 

  《침이 고인다》는 내 생각에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각별함이 드러난 소설 같다.

  <도도한 생활>의 만두 장수 어머니, <칼자국>의 국수 장수 어머니,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블랙박스 어머니는 극단적이지만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나는 <플라이데이터리코더>의 어린 소년의 울음이 인상 깊었다.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어머니를,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 어머니를, 앞으로 해줄 것이라는 하나의 기대도 없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보내준 소년.

  '블랙박스'라는 물체를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고, 자신의 온기로 따뜻하게 만들고자 품에 안아 들던 소년.

 

  '어머니'라는 존재는 조금만 오래 생각해봐도 먹먹해지는 존재다. '부모님'이라는 자리가 참 사람을 외롭고, 고되게 하는 것 같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모든 말씀과 행동도 자식들은 듣기 싫어하고, 사회에선 직장인으로서 가정에서는 부모님으로서 누리는 것보다 해줘야 할 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이 책이 내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좀 살펴보자면,

  첫째, '껌'이 싫어질 것 같다.

  둘째, '건포도'가 좋아질 것 같다.


나는 입 안에 건포도를 털어 넣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건포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걸 먹으면 왠지 까맣게 졸아붙은 캘리포니아 햇빛을 씹어 먹는 기분이었다.
_도도한 생활
어쨌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그날 밤, 후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 때문에 후배와 살게 된 건지도 몰랐다.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_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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