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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4. 2022

무진기행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계절을 넘어가고 있다. 계절을 넘기는 문턱마다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봄에는 영화 <4월 이야기> 속 벚꽃 흩날리는 이삿날 아침이 떠오르고, 영화 <빅 피시>에서 노란 꽃들 사이로 고백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두 영화 모두 생각만 해도 꽃내음이 폴폴 날린다. 여름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마루에서 수박을 드시는 한석규 아저씨와 립스틱을 고르는 심은하님이 떠오른다. 두 분이 함께 스쿠터를 타고 가는 모습도 참 사랑스러웠는데!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과 <그들이 사는 세상>, 그리고 일드 <스이카>도 여름이면 빼놓을 수 없다. 슬슬 쌀쌀해지는 가을이 다가오자 갑자기 시집이 너-무 읽고 싶어졌다. 가을에는 가을이라는 계절과 잘 어울리는 갈색 표지의 두 시집이 아무래도 가장 인상 깊다. 기형도 시인의 <잎 속의 검은 잎> 그리고 류근 시인의 <상처적 체질>이 올 가을 가장 많이 생각이 났다. 짧은 가을의 마무리를 보내는 요즈음, 조금은 이르게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겨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영화 <어바웃 타임>과 바로 김승옥 작가님의 <무진기행> 그리고 <서울 1964년 겨울>이 아닐까 싶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_무진기행,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은 학생 때 교재 지문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단번에 좋아했던 작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화자가 궁금했다. 전날 밤, 화자는 분명 혼자 방에 들어가는 '아저씨'를 걱정했는데,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고 한다. 심지어 다음 날 '안'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아저씨가 죽을 거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사실대로'라는 표현을 쓴 걸 보면 정말 화자의 진심일 텐데. 나는 처음 읽을 때부터 정말 그랬는지 궁금했다. 전 날 밤, 아저씨는 그렇게나 불안하게 보였다. 정말, 화자는, 몰랐을까. <서울 1964년 겨울>은 스물다섯 같지 않은 주인공이 '안'이라는 형과 아저씨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다. 이 단편은 왜 읽기만 해도 옷깃을 여미게 되는지 모르겠다. 살갗으로 찬바람이 스미는 느낌이다.


  <무진기행>은 솔직히 처음 읽을 때는 그렇게 좋진 않았다. 좋아하는 작품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을 때 구태여 입에 올릴 정도로 임팩트가 있지도, 곱씹을 만한 구절이 있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역시 문학 작품이라는 건 화자의 소화 능력이 중요한 것 같다. 10대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뭔가 나도 이제 조금은 현실을 느끼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화자 아저씨는 마음에 안 들고. 다시 읽어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김승옥 작가만큼 1960년대가 딱 떠오르는 작가는 없을 것 같다. 김미현 문학평론가께서 '김승옥은 김승옥적이어서 김승옥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다. 민음사 <무진기행>에 실린 10개의 단편이 다분히 김승옥적이어서 신기하다. 가장 내 취향인 건 역시나 여전히 <서울 1964년 겨울>이다. 시간이 흐르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다.


  아참, 삼촌이랑 성함이 같아서 처음부터 친근했었다. 이 생각은 김승옥 작가님 성함 볼 때마다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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