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백일홍 도서관 02

by 산너머


봄기운이 골목마다 비치되어 갈 때쯤 도서관 일은 앉아서 밥 떠먹기였다. 텃새 자원봉사가 퇴근하면 오후엔 기간제 사서 둘이 출근한다. 도서관 문 여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자원봉사는 오전에만 일하고 기간제 사서는 낮 근무와 밤 근무를 나눠 일한다. 밤 근무를 야간연장이라 하고, 나는 도서관 문을 열고 밤 근무는 도서관 문을 닫는다.

텃새에게 한번 물어본 건 두 번 이상 안 물어봤고 밤근무를 하는 사서들에게 두번씩 물어보니 삼세번 만에 도서관 일머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점심은 집에 가서 먹었다. 점심시간에는 부리나케 걷지만 퇴근할 때는 골목 구경을 했다. 단독주택과 연립주택단지에는 손바닥만 한 화단과 땟국이 흐르는 화분에는 관심쟁이 봄꽃이 피어났다. 보라색 매발톱꽃을 볼라치면 라일락꽃이 향기로 유혹했고 보도블록 틈엔 연보라색 꽃마리가, 화단 끝엔 제비꽃이 얼굴을 치켜들고 자기만 보라고 한다. 나는 있는 대로 봄 치마를 꺼내 입고 길목을 누비고 다녔다. 초봄에 흰 꽃이 피고 지면 분홍과 노란색, 보라색 꽃이 흐드러지고 꽃무늬 치마는 팔랑나비가 되어 꽃과 잘도 어울렸다.


밤사이 반납함에 넣은 책을 오전 9시 정각에 꺼내 어린이 자료실과 종합자료실 책을 분리 후 북 트럭(작은 바퀴가 네 개 달림)에 싣고 힘껏 밀어 엘리베이터를 탄다.

“우랑탕탕 끌끌끌 우당탕 턱 탕탕 끌끌끌”

이런 소리가 나서 트럭이라 하나 보다. 어제 날짜로 바꿔 소급으로 반납을 한다. 소급을 안 하고 하면 어제 반납날짜인 책이 연체되어 문제가 생긴다. 나도 소급을 안 하고 반납처리를 한 적 있었다. 수동으로 날짜를 바꾸는 거라 누구나 한두 번씩 실수하지만, 이용자 입장에선 불쾌한 일이 된다.

기억나는 이용자가 있다. 정중하게 사과를 하라고 해서 고개 숙여 사과를 여러 번 했고 대출하는 데 아무 문제없는데도 손이 올라와 따귀를 때릴 것 같았다. 연체된 게 그냥 기분 나쁘단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리 집 엘리베이터에서 이 이용자를 만났다. 난 금방 알아봤는데 모르는 것 같았다. 한 동에 사는구나. 못 알아보니 그나마 다행이구나, 했다. 모르는 척한 건가? 나처럼 좁고 낡은 아파트에 사는 성깔 있는 남자. 거저 줘도 안 쳐다본다.


책을 다 처리하고 다시 북 트럭에 싣고 서가로 가서 청구기호에 맞춰 책을 꽂아야 한다. 책 허리 밑에 붙은 라벨지 번호를 보고 제자리에 꽂아야 책을 찾을 때 금방 찾을 수 있다. 잘못 꽂으면 십만 권이 넘는 서가를 다 훑어야 한다.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왔다가 제자리에 책이 없으면 이건 너무 난처한 일이다.

종합자료실에는 책을 꽂아주는 남자 직원 두 분이 있다. 주로 그분들이 책을 꽂아주지만 수십 칸의 서가는 두 분이 다 볼 수 없어 사서들이 몇 칸씩 나눠 책임지고 배열을 봐야 한다. 남자 직원 한 분이 굉장히 꼼꼼하다. 대나무 자를 들고 비뚤어진 책이나 청구기호가 안 맞으면 자로 책을 탁탁 치며 지적을 한다. 기분은 나쁘지만 맞는 지적질이라 눈이 아프도록 배열을 보다 보니 청구기호가 안 맞고 책이 자로 잰 듯 줄이 안 맞으면 나 스스로 불편해졌다.

책을 다 꽂으면 오전엔 한가하다. 그럴 때 차 한 잔에 간식도 먹고 책 읽는 시간이 생긴다.


텃새 자원봉사는 봄이 올수록 내게 시큰둥이다. 내가 말을 걸면 눈도 안 마주치고 단답식이다. 텃새가 왜 나를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후에 출근하는 야간연장 사서들과는 농담도 주고받고 고층도 나누고 차도 같이 마시는데. 뭐가 문젠가…. 으흠…. 내가 봄바람 꽃무늬 치마를 입고 찰랑찰랑 설쳐대서 그런 것 같다. 남자 직원들이 치마가 예쁘다고 종합자료실이 나 때문에 화사하다고 해서 그런 것 같다. 창밖에 봄꽃이 저리도 가슴 저리도록 예쁜데 난들 어쩌란 말인가?

“너도 치마 입고 다녀라. 등산복은 그만 입고.”

이때 나는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 빠져서 조금 불편하지만 까짓 거 상관이 없다. 작가는 나이가 들어 자전적인 글을 썼다. 나도 이렇게 사연이 많지만 이 작가처럼 맛깔나게 쓰지 못한다. 글귀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아껴가며 읽었다. 감성 가득하면서 표현력이 대단했다. 이 책은 꼭 읽어보라고 계속 추천했다. 책장 넘어가듯 하루하루 아까운 봄이 넘어갔다.


텃새 까짓 거 상관은 없었지만 도서관 출근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이유가 있어야 고치든지 사과를 하든지 할 텐데 이유를 모르겠다. 내 생각이지만 질투가 심하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아니꼬우면 출세를 하라고 하지만 내가 그럴 능력도 없고 처지도 안 된다. 자원봉사는 무보수다.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도서관 일을 경험하고 싶어서 자원봉사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 무시했다. 내가 돈이 없는 형편인 걸 자원봉사는 알고 있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그래? 알아 나 돈 없다. 근데, 나 때문에 손해 본 거 있어? 나한테 보태준 거 있냐고? 그럼 나도 가만히 당할 사람은 아니지.


어두운 골목길에서 둔기를 휘둘러 살인을 하는 사건들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나는 그런 사건에 집중도가 높아서 상세히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었다. 범인이 안 잡히길 은근히 바랐다. 대리만족이랄까? 살인 사건마다 흥미로웠다. 나에게도 그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살인 소설이 대출이 잘 되는 걸 보면 사람 안엔 누구나 그런 심리가 깔려 있다. 나는 살인 소설은 안 읽는데 살인 사건은 흥미롭단 말이야. 사람은 선하기보단 악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누구나 집엔 둔기가 있다. 망치를 꺼내서 살인 사건을 보면서 휘둘러봤다. 나는 남자가 아니고 덩치가 작은 여자지만 위에서 힘껏 망치를 내리치면 머리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고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정면에서 내리치면 안되고, 뒤에서 몰래 내리치면 머리를 빠갤 수 있겠지? 무슨 소리가 날까? 피는 얼마큼 어디로 튈까?

텃새 자원봉사를 내리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먼저 신문지로 망치를 쌌다. 비닐로 두 번 더 쌌다, 망치에 피가 묻을까 봐 싫었고 가방에 감춰야 하니깐. 손잡이 부분에 박스테이프로 둘둘 말아 붙였다. 일회용 비닐장갑과 목장갑을 준비했다. 비닐장갑을 먼저 껴야 손에 피가 안 묻고 목장갑을 껴야 망치가 미끄러지지 않는다. 감싼 망치를 가방에 넣었다.

나는 평상시에도 큰 가방을 들고 다닌다. 가방 안엔 책이 한 권 있고 여름엔 에어컨 바람이 추워 카디건을 가지고 다녔고, 찬 바람이 불면 목도리를 넣었다. 수첩, 필기도구, 간식, 화장품, 휴지, 손수건. 그리고 망치가 가방 밑에 들어가 있다. 못을 박는 보통 크기의 망치지만 가방이 묵직해졌다. 텃새가 어디로 퇴근을 하는지 알아두었다. 미리 골목에 대기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갈기기로 했다. 텃새가 퇴근하는 시간이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시간이다. 텃새도 걸어서 도서관 자원봉사를 다녔다. 그래, 비 오는 날이 좋겠다.


늦봄엔 비가 자주 내렸다. 날씨 예보를 보고 비 오는 날엔 잘 싼 망치를 가방에 넣고 출근을 했다. 바로 실전에 들어가진 못했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젊을 때부터 둔기로 사람을 죽였다는 뉴스를 빼놓지 않고 섭렵했지만 젊을 땐 순수해서 망치를 준비한 적은 없었다. 쉰 살이 되니 순수는 빛바래지고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불행해 보였고, 특히 나를 무시하는 것들을 미워하다 보니 그게 점차 쌓여 망치까지 준비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먼저 도서관을 나와 텃새가 퇴근하는 골목에서 기다렸다. 등산복을 입고 우산을 쓴 텃새가 빠른 걸음으로 오는 게 보였다. 우산을 쓰면 망치를 휘두리기 불편해 우산을 안 썼다. 비가 적당히 내려 다행이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텃새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방에서 망치를 꺼내 뒤로 감추며 다가가는데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실천할 수 없었다. 나는 텃새를 죽이고 싶진 않다. 다치게 하고 싶을 뿐이니 살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럼 살인미수인가?

며칠 후 한낮에 분무기로 뿌리듯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또 미리 나가서 그 자리 그 골목에서 기다렸다. 텃새가 온다. 망치를 꺼내려는데 텃새가 먼저 날 발견했다.

“어? 식사 안 가고 여기서 뭐 하세요?”

“네!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

이 여자는 대꾸하지 않고 또 날 무시한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엉겁결에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인사도 없이 휙 돌아서 간다. 무시하는 저 태도, 표정, 눈빛 이 여자를 죽이고 싶다. 언젠 죽이고 싶지 않다며? 순간 죽이고 싶었다는 거다. 성공하지 못했다. 난 소질이 없나 보다. 그렇지 않다. 팔을 들어 내리치기만 하면 되는 건데 운이 없는 거다. 그 뒤 망치를 몇 번 더 가지고 출근을 했는데, 한 번은 비가 오다가 그쳤고 한 번은 텃새가 다른 길로 가버렸다. 망치를 가방에 넣고 출근하는 날은 아침부터 밥맛이 없고 점심도 밥맛이 없어서 기운이 달려 무거워 망치를 안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마음이 여린 난 다른 방법으로 돌려야 했다. 텃새에게 뜨거운 커피를 쏟는 척 뿌려야겠다. 자주 커피를 쏟는 연습을 했다. 커피를 마시는 척하다가 내 키보드 위에 쏟았다. 걱정할 것 없다. 키보드 위엔 비닐 커버가 씌어있으니까. 의자에서 일어나다가도 바닥에 커피를 쏟았다. 텃새는 더 무시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머! 으아, 또 실수.”하면서 커피를 닦았다. 매일매일 기회를 엿봤다. 오늘 해 보자.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다. 종이컵에 가득 커피를 탄다. 텃새가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도 내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후후 불며 후룩후룩 두 모금을 마시다가 텃세가 딴짓하는 걸 보자마자 뜨거운 커피를 뿌렸다.

“악! 뜨거!”

얼굴에 뿌린다는 것이 가슴 쪽 옷 위로 뿌려졌다. 실패다.

“괜찮아요?”

“왜 이렇게 커피를 자주 쏟아요. 짜증 나게.”

나는 휴지로 그 여자 가슴팍을 탁탁 치며 닦았다.

“실수였어요. 얼른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닦아요.”

텃새는 내 손을 확 치우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괜찮냐, 데지 않았느냐, 어디 한번 보자, 했더니 대답도 안 하고 저리 비키라 한다. 다음날도 똑같이 물어봤지만, 대답도 안 한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은 안 했다. 미안하다고 하면 일부러 했다는 걸 인정하니까 안 했다. 나는 두 번 더 실수한 척 커피를 쏟았다. 얼굴로 뿌리진 못했다. 생각해 보니 얼굴로 뿌리다가 흉터가 남거나 눈에 들어가면 손해배상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았다. 신발에 뿌리고, 바지에 뿌렸다. 텃새는 내가 커피만 타려고 하면 벌레 본 듯 피했다. 나는 커피를 후룩 후루룩 마시며 혼자 실실 쪼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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