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을 생각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잠들어 있다. 잠든 채 태어나고 잠든채 살아가고 잠든 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잠든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은 기계처럼 살며 기계처럼 생각하고 느낀다. - 앤소니 드멜로 / 알아차림 -
앤소니는 그의 책 '알아차림'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 무의식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육체와 생각을 지배하는 마음, 뇌 조차도 본질적인 자아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쉽게 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의 대부분의 행동과 의사결정이 무의식 중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전문적인 심리학자나 물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들의 행동과 의식의 90% 이상은 무의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소위 말하는 '빙산의 일각'이란 표현처럼,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10%에 미치지 못하며, 90% 이상은 잠재의식으로 깊이 저장되어있던 내면의 지식과 경험, 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뉴욕의 유명한 작가 겸 강연가인 '말콤 글래드웰'은 '티핑포인트', '아웃라이어', '블링크', '다윗과 골리앗' 등 세계적인 책을 저술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내가 매우 존경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저서 중 '블링크'는 찰나의 순간 판단으로 대부분 의사결정과 행동이 이루어진다는 무의식의 세계를 사례와 논리로 정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의 한 일화로 세계 정상급 테니스 코치 빅 브레이든(Vic Braden)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테니스 선수들의 순간적인 동작만으로 '더블볼트'를 예견하는 놀라운 판단력을 가졌다. 테니스에서는 두 번의 서브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중 한 번은 꼭 성공시켜야 한다. 두 번째 서브마저 실패하면 ‘더블폴트’로 점수를 잃는다. 브레이든은 선수가 더블폴트를 범할 경우 어김없이 자기가 그것을 눈치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수가 공을 띄우고 라켓을 뒤로 당겨 막 공을 치려는 순간, 브레이든이 불쑥 내 뱉는다.
"아, 안 돼. 더블폴트야."
그 순간 너무도 확실하게 공은 옆으로 비껴 가거나 멀리 날아가거나 네트를 맞힌다. 시합하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보는 텔레비전으로 보든, 서브 넣는 선수를 얼마나 알든, 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브레이든은 말한다.
"언젠가는 생전 본 적도 없는 러시아 여자 선수에게 ‘더블폴트야!’라고 외치고 있었지요."
단지 운만은 아니었다. 행운이란 말은 동전 던지기에서 이겼을 때나 하는 말이다. 더블폴트는 사실 드물다. 프로 선수는 한 경기에서 수백번 서브를 넣지만 더블폴트는 서너 번이 고작이다. 그는 어느 프로 테니스 대회에서 작정하고 경기를 지켜보다가 관람한 경기에서 나온 더블폴트 17개 중 16개를 정확히 예견했다.
문제는 브레이든이 본인 스스로는 테니스 선수의 어떤 동작에서 더블폴트를 직감하는 지 모른다는 것이다. 수없이 같은 장면을 비디오를 통해 되돌려 봐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더불폴트를 예견하는지 설명을 못한다는 거다. 마치 모조품을 한 눈에 보고 단번에 알아채는 미술 전문가의 능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선수들의 자세나 공을 올리는 방식이나 동작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그 움직임이 무의식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더블폴트의 ‘지스(giss)’를 골라낸다. 서비스 동작의 어떤 부분을 얇게 조각을 내서 관찰해 눈 깜작할 사이에 그걸 알아채는 것뿐이다.
순간적인 판단은 굉장히 빠르다. 경험의 매우 얇은 조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무의식적이다. 순간적인 판단과 빠른 인식은 잠긴 문 저편에서 일어난다. 브레이든은 방의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며 테니스 서브에 서서 자신의 판단에 마중물을 부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반면에 이런 무의식에 의한 판단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례도 있다.
한 때 펩시가 코카콜라의 아성을 뒤흔든 적이 있었다. 1972년에는 코카콜라와 펩시의 점유율이 18%, 4%로 비교 대상이 아니였으나, 1980년대 초부터는 판도가 조금식 바뀌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점유율이 12%, 11%로 근접해 있었다. 그 시기에 펩시는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펩시 챌린지’라는 길거리 블라인드 테스트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즉, 코카콜라 애호가들은 두 잔에서 한 모금씩 시음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들이 대부분 선택한 것은 펩시였다. 코카콜라 경영진들도 자체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으나, 57%와 43%로 펩시가 우세한 결과를 받았다. 코카콜라 경영진에게는 매우 참담한 결과였다.
급기야 펩시의 성분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펩시처럼 단 맛과 부드러움이 더 들어간 ‘New Coke’를 내 놓았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코카콜라 애호가들이 뉴코크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항의가 잇따르면서 코카콜라는 위기에 빠졌고, 불과 몇 달 뒤에 ‘Classic Coke’라는 이름으로 다시 옛날 코크를 팔기 시작했으며, 얼마 후 ‘뉴코크’는 소용히 사라졌다.
실제로 블라인드로 한 모금 시음에서는 자극적인 단맛의 펩시의 선호가 높았으나, 전체 점유율은 큰 변화가 없었다. 초창기부터 변함없이 지켜온 코카콜라만의 유명한 비법은 계속 지켜졌다. 소비자들은 한모금 테스트 때는 더 달콤한 제품을 선호하지만, 병이나 캔을 통재로 마실 때는 오히려 단맛에 물릴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브랜드 이미지, 캔, 심지어 로고의 고유한 빨간색까지 코카콜라에 대해 가진 무의식적 연상 일체를 통해 제품을 구매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의 세계는 판단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인간 삶을 좌우한다. 이런 심리적인 약점을 이용해 마케팅이나 정치적 캠페인이 성공하는 것같다. 가끔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가 무의식의 세계를 통제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올바른 사고와 견해를 가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평상시 먹는 음식이 나의 건강과 체력을 좌우하듯이, 평상시 주입하는 정보와 데이터들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편견없이 균형을 잡도록 골고루 섭렵해야 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책만 읽으면 편향된 이론만 쌓일 수 있고, 방향을 잘 못 잡을 수 있다. 장르와 견해를 넘나드는 책읽기와 균형잡힌 글쓰기 수련만이 '무의식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