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오래 사는 것은 이제 당연한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돈이 있다고 노후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다들 돈 걱정만 하며 늙어간다. 대책없이 쓸쓸하고 고독한 노후를 보내다가 하나둘 세상을 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늙어가는 노인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늙어서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거다. 늙어서 즐거워야 진짜 성공한 삶이다. - 김정운 / 작가 / 화가 /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
김정운 교수는 유쾌하며 박학다식한 괴짜다. 그가 한 참 티비를 통해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 연말 세미나에 초청되어 강의하는 모습을 지척에서 본 적이 있다. 아담한 체구에 악성 베토벤처럼 부스스한 머리스타일, 안경 너머로 개구쟁이같은 표정을 보이며 특유의 유머러스한 강의로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 그가 돌연 속세를 떠나 여수 앞바다 섬에 숨어들어, 자기만의 공간 ‘미역창고’를 지어 산다. 실제 미역창고로 쓰던 건물을 개조하여 서고와 작업창고로 사용하려고 예상보다 두 배 비용을 썼다는 후일담이다. ‘외로움을 피해 관계로 도피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은 없다며, ‘관계를 피해 외로움을 선택’한 그는 그동안 눈먼 고기도 잡고, 책을 읽고 쓰며, 그림도 그리는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 벌써 10년이 다 되 가도록 그 미역창고에서 나올 생각을 안하고 있다.
그에게는 몸과 마음의 재충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독일 유학을 마치고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재치있는 입담으로 티비를 통해 강연과 평론으로 유명해졌고, 수많은 곳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강연료도 당시 시간당 천 만원을 초과하는 최정상급 대우를 받았다. 이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 단기대학부에서 ‘일본화’를 전공한 것이다. 심리학 교수로 명성을 날리던 사람이 모든 권리를 버리고, 그림 공부하러 일본 유학을 갔다는 소리에 호사스런 놀이의 연장선으로 봤다.
그러나 그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는 회상하기를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군대(20대), 독일 유학(30대), 교수 생활(40대), 그리고 ’일본 유학(50대)이다.”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그 모든 과정이 현재의 유쾌하고 즐거운 일을 하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지난 날을 회상할 때 당시에는 어떻게 견디고 버텼는지 기특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런 '견딤과 버팀'이 있었기에, 지금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다른 학과 선생님이 그를 고약한 문제아 취급할 때 유독 미술 선생님만큼은 그를 천재로 보고, 미술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미술 과외를 받을 여력이 없어 대신 ‘건축과’에 들어갔다. 건축가에 들어가면 그림을 많이 그리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업수학’만 죽어라 하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고 재수를 통해 ‘심리학과’에 입학 후 평생 심리학자로 살아온 것이다. 그에게 ‘그림’과 ‘건축’은 오랜 꿈이자 행복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 여수 앞바다 섬에 있는 ‘미역창고’는 그의 로망이자 평생 꿈의 산실이 되는 공간으로, 그곳을 찾아 일부러 ‘외로움’을 자초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이 나이가 되도록 힘든 과정이 수없이 있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전공에 맞춰 적당히 취업한 직장은 거의 10년 단위로 직장을 옮겨 다니며 제대로 된 열매를 만들어 보지 못하고 매번 아쉬움을 남겼다. 옮긴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만개할 때 쯤이면 여지없이 외풍을 맞아 회사가 문을 닫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첫번째 직장인 외국계 보험회사는 IMF 당시 '대우그룹'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두 번째 직장인 삼성캐피탈은 2003년 '카드대란'과 함께 삼성카드로 흡수합병이 되면서 사라졌다. 세 번째 직장인 두산캐피탈은 모그룹 건설사의 '금융위기'로 타회사로 팔아 넘겨졌다. 본의 아니게 한 발 먼저 직장을 옮기며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 없었으나, 일을 통한 즐거움과 유쾌함 그리고 행복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월급쟁이라는 모자를 쓰고 '안전구역'에 갇혀 산다. 안전구역은 공포와 한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른 정의가 내려진다. 때로 그 범위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지만, 감히 그 한계 밖으로 발을 내딛는 사람은 극소수다. 종종 그런 용기 있는 사람들이 실패와 후퇴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전지역을 보다 넓혔다는 만족감과 큰 성공에 대한 달콤한 꿈을 맛보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언젠가는 홀로 독립을 해야 한다. '안전구역'을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다면, 자연스럽게 주어진 기회는 놓치지 말고 제대로 설계하고 원하는 대로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이런 안전구역을 벗어날 때가 된 것은 오히려 기회가 된다. 두려움과 용기가 부족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때가 되어 은퇴를 하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때, 두려움보다는 이제야 내가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 유쾌하고 행복한 일을 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새롭게 꿈을 꿔야할 때가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의 몸에는 위대한 보물이 숨겨 있다. 자그마한 그 보물 속에는 위대한, 정말 위대한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그 능력 중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에 만족하는, 공통적인 문제들에 무관심한 사람들! 과감한 프로젝트와 새로운 아이디어에 직면했을 때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열정과 용기를, 모험과 이상을 겨냥한 개인적인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 존 F 케네디 / 미국 35대 대통령 -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 보라. 그야말로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던 때를.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집에 앉아서 티비를 보거나, 한가하게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는 아닐 것이다. 당신의 삶이 가장 생동감 있고 의미 있었을 때는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흥미로운 것들을 배울 때, 중요한 인간관계를 키워나갈 때였을 것이다.
우리는 성공과 행복이 인생에 주어진 기회를 잡았을 때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행동이 어려울 뿐,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어려움에 당당히 맞서고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와 같은 자신에 대한 의심, 망설임과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를 제자리에 가만히 있도록 붙들어 놓는다. 저항의 힘은 강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저항을 이겨나갈 수 있는 저력과 능력을 충분히 키워 놓았다.
나이 들음은 곧 경험과 역량을 충분히 키워 놓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동안 모진 삶을 헤쳐 나오면서 투지와 인내, 끈기를 배웠고, 경쟁사회를 버텨오면서 지식과 역량을 내재화 시켜 왔다. 이제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새롭게 설계하고 실천할 일만 남아있다.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남은 삶을 주도적으로 주인공으로 살기 위한 ‘리빌딩’ 작업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워도 된다는 뜻이고, 마음가짐을 바꾸면 생활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세상도 다르게 보인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남은 인생은 분명 더 알차고 행복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