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신변 정리의 시간을 갖다.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해외 봉사 출국 전, '신변 정리'란 단어를 처음 봤다. 출국 전 한국의 생활을 정리하는데 직장, 학업, 보험료, 휴대폰 정지 등의 환경 정리와 친구들과 작별인사 하기, 부모님과 시간 보내기 등의 사적인 일도 포함하여 일컫는다.
고작 귀국 1년 만에 이런 일을 생각할 일이 올 줄 몰랐다.
1. 포기를 선택하기
가장 먼저 한 일은 입학할 대학원에 연락해 등록금을 돌려받은 일이다. 입학처에 전화해 등록금이 완납된 상황이고, 입학 전이라 등록금 반환을 위해 어떤 신청서를 써야 입학이 취소되는지 물었더니 '자퇴서'를 써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덧붙여, 향후 동일한 대학원은 지원할 수 없으니 신중히 생각하고 작성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미 결론난 일이라 바로 자퇴서를 넣고 이틀 안에 전액 반환되었다.
(개강 전 여름마다 하는 행사가 있다 해서 동기가 될 분들도 만나고, 밥 먹고 카톡방도 열고 통성명도 다했는 데 그렇게 한 번만 보고 작별 인사했다)
회사에는 10월까지 다니기로 하고 계약서를 다시 작성한 뒤, 부서별, 과제연구원 선생님들 별로 송별 일을 정해서 식사를 했다. 결혼이라는 좋은 소식으로 인사하고 떠나보낼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 주시는 선생님들과 언제 다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깊었다.
처음 발 들인 연구 환경 덕분에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한다. 그런 환경은 연구책임자 선생님의 인품 덕분이었다. 항상 동료 연구진으로 일을 맡기셨고, 따지고 보면 그냥 돈 주고 계약한 일개 근로자일 뿐인데 항상 나의 안위를 물어봐주셨고(오지랖이 아닌 진심), 적당히 쉬고 일하는 게 중요하다며 휴가 및 업무시간 휴식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잠깐 사용하는 비용 지불 대상이 아닌, 후배이자 동료로서 결국 동종업계 인적 재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해주셨다(빨리 박사 하셔야 한다 등). 그러한 격려와 자유로움이 없었다면 진작에 제 풀에 지쳐 역시 머리가 모자라면 못하는 건가, 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만약 첫 시작이 대학원의 학생 신분이었다면 여기도 똑같네, 이러고 실망했을 것이다. 같이 계신 선생님들 모두 동일한 얘기를 했다. 선생님을 만난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큰 행운이라고 여겼다.
고로, 사직서를 내는 게 가장 어려운 포기였다. 인생의 두 번 안 올 사람이 둘 있었는데 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사람을 선택했다. 이로써 나의 세 번째 조각 경력이 완성됐다.
2. 네 번째 조각 경력 연결하기
한국에서 다니는 직장은 그만뒀지만 해당 연구에 연구진으로는 계속해서 남아있기로 했다. 처음 결혼한다고 연구책임자 선생님께 말씀드렸을 때, 혹시 연구를 계속할 마음이 있다면 우리 연구에 공동연구진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논문을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2019년을 떠들썩하게 한 고등학생 1 저자 사건은 논문을 쓰게 해 준 주체가 부모나 친인척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어서 논란이 일었다.
나는 선생님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고작 1년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한 인연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를 구축하고 전반을 잘 관리하고 키워줬으니 우리는 협력을 한 것이고, 협력을 한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논문을 쓰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올리고 중국에 가서도 논문을 계속 쓸 수 있었고 국제 저널에 내 이름이 박힌 논문이 출판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중국어 공부와 영어공부를 병행하며 현지에서 내가 다닐 수 있는 대학원에 지원하는 것이 남겨진 과업이었다. 남편도 지속적으로 내 직업은 주부가 아니라 학생이자 수험생이라며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중이다.
3. 소식 전하기
"나 결혼해."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20대 안에 하게 될 줄 꿈에도 모른 한 문장이다. 지인, 친구들, 가족들에게 바로 알렸다. 결혼식은 따로 없고, 신혼집이 한국에 없다, 에서 다들 두 번 놀랐다. 곧이어 침착함을 되찾고는 너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농담을 던졌다.
나는 내가 그럴 줄 몰랐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맏딸이 30대는커녕, 40대에도 결혼을 못 할 거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보기 좋게 빗나간 예상에 당사자를 포함한 모두가 놀랐다. 한 방에 연애와 결혼이 골인하다니, 믿을 수 없어. 사기당한 거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모든 일은 놀랄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4. 브라이덜 샤워
결혼식을 가족, 친지들하고만 하기로 했다. 친구들은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났지만 대학을 부산에서 다녀서 수도권에 있는 소수의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부산에 있다. 나도 없는 시간 쪼개어 내려가야 했지만 이대로 결혼식에서도 못 보고, 심지어 한국에도 신혼집이 없다 하니 친구들이 브라이덜 샤워를 준비했다. 이 무리에서 첫 번째 결혼 타자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사진 찍기 바쁘다가 아무 말 대잔치로 축포를 쏘아 올리고 바삐 식사를 마친 뒤, 나이트 근무가 있는 친구들 먼저 작별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정리도 다 같이 했다. 다들 바쁜 와중에 챙겨줬는데 여전히 집들이 한 번 못 오고 있다. 작년엔 언어가 안 돼서 그랬다지만 2020년 목표는 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남편이 해 주는 동파육(중국 고기찜 요리)을 먹이는 것이 제2 과제다. (제1 과제는 대학원 입학)
4. 중국어 과외
결혼 준비하면서 두 개의 어플을 알게 됐는데 하나는 [숨은 고수]였고, 다른 하나는 [브런치]이다. 일반적인 결혼식이 아니고, 한 달 안에 예약을 해야 하고 더불어 출국 준비까지 겹쳤으니 하나의 플랫폼에서 정보를 빨리 찾아 내게 맞는 전문가의 힘을 빌려야 했다.
결혼 준비도 준비인데 왜 하고 많은 외국어 중 중국어인가. 성조도 있고 어렵다는 중국어, 심지어 자국 내에서 세상 유일의 언어라고 불릴 정도로 영어를 포함한 나머지 외국어가 안 되는 곳이라서 아주 기초라도 배워가야 했기에 결혼식장, 예복을 예약하기 전에 과외 선생님 먼저 구했다.
성조부터 시작해 두 달 동안 결혼 준비한다고 핑계 대며 숙제도 안 해온 학생을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저, HSK 5급 땄어요!"
HSK 5급 후기
+처음이자 마지막 국제학회 출장
내가 일찍 결혼에 대한 답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8월 마지막 주를 통째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8월이 끝나자마자 대학원을 가야 했기에 개강 전에 입학 취소를 알려야 등록금을 돌려받을 수 있어서 서둘러 결정했다.
결혼하자!,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 학회 준비(포스터 발표) 하다가 몸만 가서 선생님들이 만들어준 스케줄대로 따라다녔다.
(아프리카 살다 왔지만, 너도 나도 다 갔다는 유럽 한 번 못 가본 20대, 서구권 국가를 처음으로 밟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