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일 년의 기록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갈 짐은 캐리어 두 개. 대부분이 옷가지였다. 해서, 신혼여행을 마치자마자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결혼식 마치고 신혼여행지인 괌을 다녀와서 신혼집으로 바로 가는 직항이 없었기에 한국을 경유했다.
말 그대로 경유지라서 5시간 후 다시 출국장으로 향해야 했기에 내 짐은 인천공항으로 가족들이 가져다 주기로 했다. 이 시간이 다음 명절 전까지 보는 마지막 시간이 됐다. 밤 비행기로 누덕 해진 우리는 씻고 싶어서 입국장에서 나오자마자 마중 나온 엄마와 동생이 묵은 숙소에 갔다. 체크아웃이 되기 전까지 시간이 있어서 둘 다 샤워하고 공항 안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티켓팅을 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하늘을 날아 도착한 신혼집.
우리 집에 들어가고 일주일동안 부지런히 집 청소를 하면서 주부로서의 생활에 적응해갔다. 커뮤니티 카페를 통해 알아본 근처 중국어 학원에 연락해서 면담을 하고 시간상 가장 빨리 등록이 되는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한국에 언제 가나 했는데 결혼 준비부터 무리해서인지 운동 좀 했더니 근육통이 심해지기 시작하면서 며칠 동안 종아리와 허벅지가 당겼다. 그 무렵, 남편이 깜빡했다면서 동반비자를 미리 한국에서 신청해야 했는데 본인도 일이 바빠서 알아보지 않고 있다가 직원이 부인의 동반비자가 있어야 거류증 등록을 할 수 있다고 말해줘서 어서 한국에 다녀오라고 했다.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종로에 있는 중국비자센터에 동반비자를 신청해 놓고 병원으로 향했다. 친정집 근처 자주 가는 병원에 가니 '횡문근 융해증(근육이 파열되어서 신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오름)'이라며 입원을 권유했으나 병원에만 앉아서 금쪽같은 시간을 날릴 수가 없어서 통원치료를 했다.
주사실에 갈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이 혼자 계셨는데 3일째 오니까 왜 입원 안 하고 통원으로 몇 시간씩 수액 맞고 가냐고 물으셨다.
"중국에 살아서요."
라고 하니 한국말을 참 잘한다고 칭찬해 주셔서 아, 집만 중국이고 한국인이에요, 답해드렸다.
그렇게 5일여간의 시간이 지나고 비자를 받아 들고 귀국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빨리 계좌를 개설해서 편하게 살려면 한국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후딱 신혼집에 들어가서도 현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고 그땐 수액을 맞는 게 현지 병원이라 두렵기도 해서 진료는 조선족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지만 처치실엔 말이 통하는 간호사 선생님이 없었기에 그냥 수분을 많이 섭취하라는 처방만 받고 집에서 자가 치료했다.
(1년이 되었을 때, 장염으로 동네 보건소 가서 중국어로 진료받고 처치받았다. 아픈 와중에 1년 전 저 시절이 떠오르며 감격스러웠다)
직장이 없는 교민은 동반비자로 거류증을 신청한다. 인생의 동반자, 중국 생활을 영유할 수 있게 하는 반려자로 승인받는 작업은 한 달이 넘어서야 완료되어 당당히 거류증이 찍힌 여권을 회사로부터 돌려받았다. 거류증 심사를 위해 남편의 현지 직원이 시내로 두어 번 정도 건강검진을 데려가서 확인증을 받고 사인을 하니 심사가 2주일 이내에 완료되었다.
이제 따로 비자 신청할 필요 없이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고, 계좌도 개설이 되어 큐알코드로 결제를 할 수 있는 편안한 생활이 열렸다.
덧, 해당 거류증은 1년에 한 번씩 갱신해야 한다. 갱신할 때 한 달 정도가 소요될 수 있으니 비자 만료일을 잘 확인해서 생각 없이 그때 비행기표를 끊지 말아야 한다. 작가 본인은 생각 없이 4월 아버지 환갑여행으로 베트남 출국 표를 끊었다가 남편과 같은 날짜인 4월에 만료일이 찍힌 걸 보고 아차, 하며 이대로 출국하지 못하나 전전긍긍했더랬다. 운이 좋아 무사히 전전날에 갱신이 되어 여권을 받아 예정대로 출국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일하게 되면 한 번에 5년짜리 노동비자를 받을 수 있어서 1년마다 저런 상황이 연출되는 게 싫은 사람들은 5년짜리로 받기도 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 한국 제품만 파는 마트가 5개는 넘게 있고, 조선족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 음식이나 기타 생활환경 여건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한족과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나 가게도 많고, 한국에서 일하다 오신 조선족이나 한국인들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은 한국에 있는 가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문제는 생활이 편한 만큼 중국어가 빨리 늘지 않는다. 조금만 우물대면 저쪽에서 한국어를 하는 한족, 조선족, 혹은 한국인 유학생 아르바이트생이 나와서 응대해 주거나 아무도 할 줄 모르면 번역 어플을 이용하면 됐기에 유창한 중국어가 없더라도 숫자만 셀 줄 알면 중국어 다 배운 셈이나 마찬가지다.
(배달도 한국말로 다 되고, 중국 어플을 통해서 주문하려고 해도 주문 내용이 한국어로 패치되어 있어 극한의 편리함을 제공한다. 해서, 중국어 한 마디 못하면서 공부는 하고 싶은데 외국이라 두려운 사람들이 최근 이곳으로 많이들 어학연수 오는 아이러니함을 구경한다)
처음 산 아파트 단지는 심각하게 한국인 가정집을 위한 아파트 단지여서 아파트 안에 반찬가게, 미용실, 필라테스, 요가교실, 헬스장, 수영장, 마트, 세탁소, 빵집, 음식점 등이 몰려 있어서 반경 2km 내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앞에는 큰 호수공원도 있어서 편안한 감옥(?) 같은 느낌이었다. 편리해서 좋은데 나같이 나돌아 다니고 싶은 사람에겐 매우 불만족스러운 동네다.
중국어 공부를 한국에서 시작했을 때, 과외선생님이 중국에 가서 어떻게 공부할 거냐고 물으셔서 그냥 학원 다니려고요, 가까우면 대학교 어학당 다니고요, 했더니 가급적 푸다오(辅导; 과외)를 하라고 적극 추천하신 게 생각이 났으나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프리토킹 과외는 불가능한 것 같아서 학원 수강을 먼저 했다. 한 달 지나고 보니 학원에서 배우는 건 실전 회화를 높이기엔 부족한 것 같아 카페를 통해 과외선생님을 구했고 한족 선생님이 중국어로 연락했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과외는 집에서 했고 선생님은 나보다 3살 위의 선배 신혼부부였다. 아이도 아직 없고, 초등학교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다니던 한국 회사를 그만둬서 생활비를 보탤 겸 과외를 한다 했다.
수업방식은 교재 없이 한 가지 상황을 두고 자주 쓰는 말들을 배우고 연습한 다음, 종이에 적어준 단어와 문장들을 녹음해서 듣고 다음 시간에 복습하는 식이었다. 지루하지 않게 금방 시간이 흘렀다. 내용도 알차고 택배를 받았을 때, 시장에 갔을 때, 관리비를 낼 때 등 아주 필요하면서도 자주 말하는 것들을 배우니 학습 속도도 쑥 올랐다. 게다가 선생님의 성품이 좋으셔서 지각이나 수업 태도 불성실(태도 불성실은 학생인 내가 문제였다) 같은 문제는 일체 없었다. 오히려 오늘 선생님이 날이 추우니 안 오신다고 하셨으면, 할 정도로 성실하게 임해 주셔서 감사했다.
그즈음 학원 막바지에 알게 된 처지가 비슷한 언니(아이 없고, 신혼 3년 이내)를 사귀게 되어서 선생님을 소개해줬고 각자 다른 시간에 같은 선생님과 1:1 과외를 받았다. 언니도, 다른 한국분들한테도 중국에서 좀 살았다 하시는 분들한테 우리 과외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었다. 보통은 학생이거나 알선업체에서 과외선생님을 소개해줘서 오게 되니 돈 좀 벌거나 본인이 귀찮아지면 수업 준비를 안 하거나 조금 하다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도 생기고 선생님도 생겨서 가끔은 셋이서 밥 먹고 놀러도 가고 일요일에 남편들이 모두 일 때문에 집을 비울 때는 가까운 산으로 등산도 갔다. 세상 친한 절친인 남편이 곁에 있으나 그 외 사회생활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연락할 수 있는 지인들이 생겨서 만족스러웠다.
현재 : 2019년 4월에 4급을 따고, 12월에 5급까지 땄다(야호). 공부와 별개로 여전히 말은 옹알이 수준이다. 회화 공부를 더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결혼했는데 진로 고민이라니, 싶지만 학교든 일이든 바깥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상, 하루라도 빨리 시작도 못하고 끝내버린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장사를 하거나 알바를 할 수도 있었지만 한 번 재미를 붙인 보건학 일이 계속하고 싶었으며 일단 논문을 계속 쓰기로 하고 온 터라 그에 합당한 학위가 필요했다.
1안은 지금 집에서 가까운 의과대학이 있는 종합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9월 입학을 위해선 5월에 대학원 진학 원서를 쓸 수 있지만 중국어 실력에 대한 회의론이 있어서 관두었고 2019년은 내년에 중국대학원을 진학할 수 있는 HSK(중국어 검정 능력 시험) 급수를 따 놓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제일 현실적이라 생각했던 중국대학원 진학은 몇 가지 장애물이 존재했다. 일단 학교 레벨이 한국에서 전혀 모르는 학교다. 중국에서 진학하는 대학이라면 몇몇 유명한 대학들이 있으나 내가 사는 지역은 상해 쪽도 아니고 북경 쪽도 아니었다. 동북 지방 언저리의 해안가 지방이라 의대가 유명하지도, 과학기술대학이 유명하지도 않은 지방이다.
굳이 한국의 서울권 보건대학원 수준을 찾아가려면 기차로 3시간 걸리는 성도(지역구의 수도, 우리로 치면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 같은 곳)의 대학교를 가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주말 부부를 할 거라면 차라리 비행기 타고 한국 가는 게 낫고 남편과 나는 이미 애초에 롱디가 어울리지 않아 포기한 사람들이라서 중국 내 다른 지역의 대학원을 가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었다.
그럼 가장 가까운 대학교의 대학원은 괜찮은가, 하면 자차 없이 대중교통으론 통학이 무리고, 자차로 1시간 거리를 기숙사 두고 다니기도 애매했다. 기간은 3년, 잘하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생활비까지 보탬이 되며 학생을 할 수 있지만 현재 대학원을 다니는 한국 학생과 연결이 되어 만나서 알아본 결과, 현지 친구들의 취업이 중심이고 학교가 국가의 돈으로 운영되다 보니 어학이나 역사, 상경계열이 아니라면 외국인에게 관대하지 않으며 모든 외래어를 한자로 표시하는 국가의 특성상, 만일 중국에서 영원히 사는 게 아니라면 향후 유학을 염두해 둬야 하는데 과연 얼마나 실제적으로 이곳에서 중국어로 수학한 학위가 도움이 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남편의 회사는 업무 강도가 세고 영원히 살만큼 복지나 기타 메리트가 큰 회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편이나 나 둘 중 하나라도 중국에 관심이 많고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상관없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게 고민의 지점이었다.
2안은 그런 와중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디스턴스 러닝;Distance learning(원격 교육)이었다. 한국에는 사이버 대학원으로 알려져 있는 교육방법인데 영국과 미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정식 교육으로 졸업장이 나오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사이버 대학원은 학교법인 자체가 '사이버'지만 영미권은 해당 학교의 전공대학 안에 존재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파트타임 대학원인 특수대학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원래 가려고 했던 대학원이 특수대학원인 보건대학원이었으니 생각해 볼 수 있는 조건이었다. 다만, 게으른 나의 모습을 볼 때 디스턴스보다 면대면으로 직접 가서 수업하는 걸 원했으나 한국에서 나름 좋다는 대학원에 자퇴서를 날리고 온 사람에게 이제 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선을 생각할 거였으면 결혼을 포기했거나 장기를 팔아서라도 유학을 갔어야 했다.
두 가지를 모두 염두해 두기로 했다. 일단 첫 번째 과업인 중국어 공부를 끝내고 영미권 학교 입학요건에 IELTS 성적이 필요하니 영어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과외선생님의 임용고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선생님도 임용 준비 때문에 5월 동안 과외를 그만두기로 했다. 과외 안 하는 동안 배우고 싶던 취미활동을 해 보기로 하고 유화를 배울 곳을 찾았다. 낮동안 시간이 남는 나 같은 아줌마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이 몇 군데 있었고 그중 한 군데에 연락해서 갔다. 중국어 과외를 잠시 쉬는 친한 언니도 같이 등록해서 한 달 동안 유화를 배우며 공부는 설렁설렁하며 시간을 보냈다.
3월부터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작년에 제출한 논문이 rejected(거절) 먹었지만 수정 부분을 일러줬으니 수정해서 다른 곳에 제출해보자고 하셨다. 당연히 선생님은 나의 상황에 허락을 구한 뒤 다시 해 보자고 해주셨다. 함께 작업했으니 끝까지 마무리하는 게 맞으니 하겠다고 했고, 밤낮없이(물론, 게으름을 좀 부리긴 했지만) 다시 분석하고 표를 만들고 수정을 해서 다른 곳에 제출했다. 논문을 써야 해서 자연스럽게 유화 그리기는 한 달에서 마무리를 하고 다시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남편이 돈도 안 되는 거 왜 하는 거니, 물었는데 나중에서야 해당 논문에 내 이름이 실린다는 걸 알고서는 네가 하는 일이 그런 거였니? 했다. 친정엄마도 딸이 연구 관련 일을 하는 건 알았지만 논문에 이름이 실리고 나서야 이런 건 교수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면서 이런 일 하는 거였냐며 반색을 했다. 내가 설명 능력이 부족한 건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건지 본인의 배우자나 딸이 그런 대단한(?) 일을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도 못했던 표정이 코미디였다.
한 편이 끝나니 6월에 갑자기 다른 한 편이 배당되어 작성을 하게 됐다. 다 쓰고 나니 6월이 다 지나갔고, 4월에 수정한 논문 답변이 와서 7월에 수정을 했다. 2019년 절반이 지났는데 아직 이룬 게 없어 초조해졌다. 중국어 시험도 초급 수준이고 논문은 많이 썼지만 결과는 없었다.
거기다 더해서 중국 대학원 입학에 회의론이 들면서 방향을 영국 대학원 원격수업으로 틀면서 영어공부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상반기에 끊어놓은 인강을 마무리하고 독학을 시작했으나 이게 그렇게 쉬운 공부면 왜 카페까지 생겨나면서 시험후기들이 많겠는가. 아직도 점수를 내려고 공부 중이다.
현재 : 9월에 작년부터 쓴 논문이 통과되었다고 연락 왔고, 12월 31일, 2019년 마지막 날에 내 이름이 들어간 다른 한 편이 통과되었다고 소식이 날아왔다. 아직 6월에 쓴 한 편의 소식이 오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한 해로 끝나기가 아쉬울까 봐 두려웠는데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아 뿌듯하다.
디스턴스 러닝으로 뱃머리를 돌리면서 중국 대학교 어학당 가려던 계획을 바꿔 IELTS 시험 준비 모드에 들어갔다. 될 때까지 해 보기로 생각하고 IELTS 공부 시작했고 첫 시험은 8월 휴가 때 등록한다.
(졸업하면 후기 남기기로ㅠㅠ) -> 2020 2월 졸업
IELTS 공부수기
그 와중에 질염이 심해지면서 휴가 때 진료받으니 자궁경부가 질염이 유발하게 생겨서 그렇다며 레이저 소작술을 권유받았고 남편과 엄마는 기왕 치료받는 김에 영어 과외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오라며 장기 요양에 들어간다. 병원 치료로 한국 가서 과외받으며 시험 쳤으나 (핑계지만) 그 날이 소작술 받고 난 후 하혈이 가장 심한 날이라서 영혼이 탈곡된 상태로 시험을 치고 돌아왔던 것 같다.
**질염이 자주 있는 분들은 자궁경부 레이저 소작술 추천드립니다. 시술도 한 시간 내외로 간단하고 수면마취로 아프지 않고 편합니다. 대신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 분비물이 많고 하혈이 심할 수 있어 저처럼 빈혈 환자처럼 지내는 후유증이 있습니다. 대신, 치료 2달 후부터 질염도 재발하지 않고 편해서 좋아요.
상반기부터 신청한 HSK 시험이 있어서 중국에 돌아오자마자 영어를 다시 뒤로 하고 중국어 시험 준비를 하고 5급 시험을 봤다. 결과는 아슬아슬하게 합격!
HSK 5급 후기
중국어는 이제 다 끝났으니 다시 영어공부 매진 중이다(ㅠㅠ어학공부랑은 담을 쌓은 내 인생이 어쩌다 흑흑).
내년엔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길 바라며 나의 공부는 계속된다.
올해 처음 한 일이자 꾸준히 한 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브런치고, 하나는 수영이다(중국어랑 영어는 작년 혹은 그전부터 한 일). 헬스장에 수영장이 같이 있어서 수영장 사용은 자유였으나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 강습으로 수영을 배운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말이 안 통해서 중국어 수영 수업 가는 건 무섭고, 한국어 수업 시간은 학원시간이랑 겹쳐서 안 맞았다.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 독학하면서 수영 부판을 잡고 발차기부터 시작했다. 하다 보니 손이 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였는데 앞으로 안 나가서 다시 집에 가서 동영상 보고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학습하고 수영장 가서 연습하고의 반복이었다. 시엄마 또한 수영장 물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수영을 좋아하셔서 수영가방까지 선물하시며 늘 나의 수영 상태를 체크하셨다. 기회가 되면 자세를 잡아주겠노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다.
수린이(수영 시작하는 어른이)들이 그토록 원하는 휴가 가서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도 해보고 남편이 학부모처럼 동영상도 찍어주기도 했다. 그 외, 운동을 꾸준히 하게 돼서 수영을 할 줄 아면 좋은 점들을 추가시켰다.
현재 : 접영 빼고 다 할 줄 안다. 접영은 아직 연습 중. 자세 연습은 한참 만참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가면 가까운 데 수영장이 없을까 봐 무서울 정도로 수영장이 가까운 지금 집이 너무 좋다.
너무 기특하고 장한 일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꾸준히 글을 써서 브런치 북을 빨리 내고 싶다고 다짐했는데 중도 포기하지 않고 드디어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되다니 말이다. 논문 쓴 거보다 기특해서 스스로 어깨를 토닥인다. 모자라고 부족한 나를 다시 돌아보며 감사한 사람들을 곱씹으며 기록을 남기는 게 행복한 일상이 되었다. 공부하기 싫어지면 글을 끄적이게 되었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에 칭찬해 주고 싶다.
출판작가가 된다거나 하는 비상한 꿈은 갖지 않는다. 그럴 깜냥도 안되고 과욕을 부리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와 비슷하게 왜 이렇게 일이 엇나가지, 나는 왜 남들이랑 같은 길을 걷지 못하고 튀어나와있나 싶은 감정을 공유하고 그런 감정을 가진 다른 독자님, 작가님들과 나누고 싶다. 오래오래 그런 동지들이 있는 브런치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브런치를 만나게 된 시간
귀국하더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 할 것 같으니 오래 한국에 있진 않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을 했어도 적어도 5년 후 일인 줄 알았지 2년도 안되어 나갈 줄은 예상 못했다. 설마, 그러겠어? 하는 일은 한순간에 벌어지는 것 같다. 인생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틀어질 때도 그냥 원래 내 인생인가 보다, 하고 물길 따라가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