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한다고 모두 여행가가 되는 건 아니듯이
*본 글은 종이책 출간 전 발행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향후 출판 서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취업과 이직은 더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최근 YP(영 프로페셔널) 인턴으로 국제개발협력 관련 단체들이 코이카 지원을 받아서 인턴 채용을 진행했는데 원래는 아는 사람 한 두 명 정도 지원하는 수준이었다면 이번엔 우리 회사 같은 작은 기관도 40명이 넘게 몰렸을 정도라 하니 큰 화두인 건 맞는 것 같다.
주변을 보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끊임없는 진로 고민도 기본 옵션으로 따라붙는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알바천국 뒤져서 지역과 시간과 임금이 가장 적당한 일만 물색해서 하면 되지, 뭐하러 전공을 고민하고 적성을 따지겠는가. 그. 러. 나. 여전히, 너무도 어려운 문제이다. 은퇴를 앞둔 우리 아버지도 교직에 오래 계셨던 교수님도 죽을 때까지 하는 게 진로/직업 탐색이라고 말씀하신다.
최근 내 글을 검색해서 들어오신 분들도 궁금해하신 것 같다. 간호사였다가 봉사자였다가 연구원이었다가 가정주부였다가 지금은 NGO단체 PM(프로젝트 매니저; 사업 관리자)인 나는 어쩌다 이 일을 하고 있으며 왜 돈과는 거리가 먼 일들만 골라서 하고 있을까, 생각이 들어 이번 글을 작성하게 됐다. 그만큼 남이 하는 일에도 굉장히 관심을 두는 편이다. 어쩌다 그 일을 하게 되셨는지, 얼마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다른 일을 하고 싶은지 등을 항상 물어보는 편이다.
경기 북부 시골 토박이로 태어나 살면서 동네가 작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란 탓인지 책을 좋아해서 읽다가 점점 색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관심이 갔고 외국을 여행하거나 사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그즈음 개도국으로 여행 가는 게 인기인 시절을 지나 그곳에서 직장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하며 부러움을 갖게 되었다.
(그때 미국이나 유럽에 가는 걸 꿈꿨다면 좀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나)
그래서 나는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고 오지나 자연이 있는 곳으로 여행 다니면 좋을 테니까 여행 자주 다니는 직업을 삼으면 되겠다고 철없는 꿈을 꾸었더랬다.
대학생이 되고 답답한 고향을 떠나 살고 싶어 경기도 근교가 아닌 친척 하나 없는 부산이라는 곳에 발을 내디뎠다. 4년을 살면서 대한민국에서 서울 경기 땅을 벗어난 타 지역에서 유일하게 적을 두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었던 정기적인 봉사활동과 방학 때 친구랑 일본으로 간 배낭여행 다녀와 보고 해외 단기선교라는 명목으로 아시아 국가도 다니면서 알게 된 건,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하면서 사는 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 분야의 일인 것 같아.’
라고 느끼며 졸업을 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임상간호사로의 삶을 살았다.
돌아와 고향에 살면서 다시 답답함을 느끼던 찰나, 아프리카 대륙을 향해 갔다.
해외봉사, 이름은 거창한
해외봉사를 하면서 대학생 때 다녔던 단기선교 때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받으며 한 가지 깨달았다.
‘아, 나는 이런 부류의 일을 재미있어하는구나. 물론, 인격적으로 모자라서 합당한 자리인가 싶다만.’
정말 재밌었다. 내 전문분야에서 주어진 목표를 가지고 다른 환경 속에서 일을 하는 게.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지만 안될 것 같았고, 봉사단원 때 일은 봉사단원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운 좋게 보건연구 일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복잡해 보이고 어려운 연구의 과정을 헤쳐나갈수록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흥미로웠다.
(물론, 그 모든 덕은 PI(연구책임자) 선생님 덕분이었지만)
‘석사 진학해서 일과 병행하다가 좀 더 구체적인 내 진로를 생각해봐야겠다. 학사로는 연구직으로 이직하기 어려우니까’, 하던 찰나,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을 결정한 이유
한국에서의 일상을 1년 8개월 만에 정리하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남편과의 일상은 행복했지만 출퇴근할 직장이 없는 나는 배터리가 다한 시계 같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정체되었고, 단순히 외국에서 살고 가끔 여행을 가는 것만으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절실히 느꼈다. 중국이 아니라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살거나 남편이 지금보다 휴가를 자주 갈 수 있는 형편이었다면 만족하며 잘 지냈을까.
가정법은 의미 없지만 그랬더라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일 없이 살 수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오프라인 대신 온라인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구직활동을 재개해 보기로 결심했다. 2020 새해 목표 중 하나가 대학원 진학이고, 다른 하나가 남편의 사직과 나의 취업이었다.
한국에서 정착할 수도 있었지만 원하는 자리가 없었다. 원하는 자리를 가려면 석사 학위가 필수였는데 지원자격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남는 건 연구간호사나 임상간호사 자리뿐이었고, 자연스레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 갈 수 있는 직장도 염두하며 구직 사이트를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었다.
돈을 생각하자니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직무와 직렬이 일치하지 않았다. 돈을 더 받으려면 큰 프로젝트나 대학 사업의 행정/비서쪽 일이었고, 보건으로 개도국에서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아예 10년 경력의 고위 책임자급을 채용하는 게 많아서 내가 지원할 짬이 안됐다. 행여 보건으로 지원할 수 있다 싶더라도 내가 바라는 사업 부분이 잘 나지 않았다. 보건이 말만 보건이지, 병원 시설 건축 쪽이거나, 물 공사, 도로 공사 같은 시행 기관과의 조율을 하는 코디네이터 역할(계약기간이 10개월 혹은 7개월로 짧고 최장 2년이래 봤자 중간에 끝나면 1년 몇 개월만 채우고 돌아오는 게 태반)이 대다수였다. 보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직무 안에서 모니터링하고 보고서 쓰는 사업 자체가 잘 나지 않았다.
역시, 행정 위주로 가야 하나, 내가 시작부터 바로 필드에서 일하면서 논문도 쓸 수 있어서 배가 불렀나, 돈 주면 뭐든 한다해야지,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조건을 까다롭게 따지지도 않으면서 내가 기존에 관심 있고 봉사단원 때 해봤던 관련 프로젝트가 떴다. 기간도 3년짜리, 게다가 이번 연도에 첫 개시 사업이라서 연장 가능성도 있는 사업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어마어마한 시골지역이었다. 에티오피아 때 살던 지역보다 더 시골일 수 있는 곳.
‘지원한다고 다 됐으면 지금 일하고 있었겠지. 그냥 써보지, 뭐.’
회사 이력서로 지원해달래서 다운로드하여 작성하고 메일 보내고나니 다음 날 알았다. 사진란을 비워둔 것을.
‘글렀네, 글렀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달래며 시간을 보내다가 면접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메일이 왔다. 때마침 설날이라 곧 들어가는데 회사에서 제시한 날짜엔 갈 수가 없다. 변경이 가능하냐, 하니 그럼 먼저 카카오톡으로 대표님과 전화하고 내가 한국에 오는 날 맞춰서 회사에 면접을 올 수 있냐고 하셔서 알았다, 하고 남편에게 그제야 알렸다.
남편은 조금 갑작스러워서 놀랬으나 늘 그렇듯, “해 봐. 되고 나서 고민해보는 거지 뭐.” 하며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카톡으로 대표님과 간단히 통화를 하고 느낌이 싸했다. 왜냐하면 나는 유부녀고 남편이랑 같이 갈 거라는 말에 반가운 기색을 표시하셨기 때문이다. 보통 결혼한 경단녀라면 취업시장에서 매우 불리한 조건인데 같이 갈 가족이 있다는 말에 기뻐하시다니, 느낌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합격할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한국에서 대면 면접엔 지금의 사수인 담당 대리님과 서포트하시는 대리님 두 분과 면접을 봤고, 파트타임으로 병원 진료를 하시는 대표님은 시간이 안 돼서 면접에 들어오지 못하셨다.
역시나 압박면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었다. 급여, 분위기, 업무 성격, 가게 될 곳의 환경, 나의 현재 상황 등을 공유하는 시간이었고, 분명 앞의 두 명의 지원자가 더 있다고 했으나 그들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싸한 느낌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면접 직후엔 시댁에 가는 일정이어서 시댁에 가서 위와 같은 얘기를 했더니, 시엄마도 “느낌이 될 것 같아.” 하셨다.
그리하여 얻게 된 지금 직장. 개발협력 보건사업 관련 직군. 3년간의 서남아시아 국가로의 파견.
배우자와 함께 갈 수 있는 곳. 석사학위가 당장 없어도 지원이 가능해서 채용이 가능했던 곳.
남편과 내가 바라던 지점의 급여와 복지(이건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낫다)는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때에 하게 됐다는 것에 감사하며 결정을 내렸다.
결론,
직업은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거의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일정 부분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하고 싶고 그리던 모습에 가까운 일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선택하는 게 20 정도라면 나머지는 환경과 상황이 80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환경을 만들어가는 태도는 나의 바람과 소망이라고 믿게됐다.
배우자를 만나는 것처럼 내가 선택하는 부분보다 우연에 이끌리어 다가오고 선택되는 게 더 큰 것 같다. 물론, 선택은 개개인의 몫이지만.
현재,
업무 자체는 서류업무 많고 행정적인 일을 뒤에서 모니터링해주는 일인데 그 일을 현장에서 하지 못하고 서울 사무실에서 하니 일에 대한 ‘재미’는 시간이 갈수록 반감되어가는 것 같다. 5월부터 확고하게 코로나로 인해 못 간다는 게 명확해지니 일을 지속하는 힘이 떨어졌다.
점심시간에 이 얘기를 하니 일이 재미있어서 하는 파 vs 일은 ‘일’ 자체이다. 재미란 것이 끼어들 수 없는 성질이다, 하는 파로 나뉘어서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을 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것도 급여를 받게 해주는 생계수단이 되면 재미는 없어진다고들 한다. 얘기를 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의미’가 있고 ‘흥미’가 생기면 직업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잘하느냐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유인즉슨, 뭘하든 잘하지 못 할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능력치는 고만고만하리라는 걸 미리 예감하기 때문이다. 뭘 하든 실수하고 깨질 것인데 ‘의미’도 없고, ‘흥미’도 안 생기면 그냥 돈 되는 거 당장 할 수 있는 아무 일이나 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란 걸 일을 하면서 느낀다.
덧, 몸이 오래 견딜 수 있는 일이기도 해야 한다. 병원 일은 의미+흥미였으나 몸이 안 받쳐줘서 쉽게 실수하기 마련이라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