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4월 1일. 햇살은 겨우내 쌓인 눈과 언 땅을 녹였다. 인고를 견딘 파릇한 새싹이 빼꼼히 세상에 얼굴을 보인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 아내는 스물여섯. 삼 년의 애타는 연애를 마치는 결혼식이 있었다.
나는 아들 넷에 딸 하나 그중 둘째, 아내는 딸 넷에 아들 하나 그중 막내다. 준비된 것 없이 사랑 하나만으로 시작했다. 직장 생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년생이었으니 모아둔 돈도 없었다. 함께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바람 잘 날 없던 오 남매를 키워 오신 부모 지원은 기대할 수 없다.
다니던 직장에 여덟 가구 입주 가능한 관사가 있었다. 마침 한 집이 비어 있었다. 미혼은 입주 자격이 안되니 우선 혼인신고부터 하고 관사를 배정받았다. 사무실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이고, 시내에선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관사 생활이 주는 불편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고 원주에서 전공 관련 직종에 취업해 직장 생활을 했다. 대학 다닐 때까지 춘천에서 지내다 처음으로 타지에서 자기만의 방을 얻고 부모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직장에서의 성취욕구도 있고 멋진 커리어 우먼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직장문화는 그런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자 직원은 '미혼'이거나 결혼하면 '퇴사'하는 조직문화가 있었고 사기업에선 특히 더했다. 업무 능력이 출중해도 결혼하면 '승진'보다 '퇴사'가 당연시되던 때다. 결혼하면서 아내도 직장을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첫아이 임신은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마냥 좋기만 한 나와 달리 아내는 임신 초기부터 입덧으로 고생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질 못해 깡말랐다. 거기다 임신으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 못 한 철부지 남편까지 힘듦에 가세했다. 지금도 신혼 초 사진을 보면 한없이 미안하다.
사십 중반을 지날 때쯤 우연히 아이들 앨범을 아내와 함께 보고 있었다. '저 때 정말 쌀이 떨어질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아내가 신혼 초 사진을 보며 한 말이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쌀이 떨어질까 걱정했다고?' '그럼 엄마가 남편에게 돈 없다는 소리 하면 직장일 제대로 못한다고 돈 없다는 소리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셔서 안 했지.' 장모님께선 가장이 생계 걱정에 짓눌리면 직장에서 판단을 흐리게 되고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음을 염려하셨던 것 같다.
신혼 초, 처가에 가면 장모님께서 아내에게 매번 차비를 주셨다. 아내는 장모님 보는데 선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5분여 거리의 시장 앞에서 바로 내렸다. 남은 돈으로 반찬을 샀다. 시장부터 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왔다. 입덧이 심해 멀미가 나면 중간에 내려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왔다. 그렇게 아낀 차비가 쌀이 되고 반찬이 되었다.
철없는 남편에게 결혼 후 20년 가까이 되어서야 우스갯소리로 무심히, 툭 내뱉었다.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당신 덕에 허튼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무탈하게 직장 생활 마무리했어. 정말 고마워요' 정년 퇴임식 자리에서 아내에게 전한 감사다. 장모님의 가르침도 감사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그걸 지켜낸 아내는 더욱 현명하다.
은퇴하고 머리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한 아내를 보니 한없이 미안하다.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이를 낳는 일이, 독박 육아가, 박봉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의 객기 받아주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아내가 견뎌 온 일에 무엇 하나도 당연한 것은 없었는데. 그 나이가 지금의 우리 딸보다 어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