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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Feb 08. 2019

월세시절, 좋은 집주인 나쁜 집주인 2

남매뿐인 월세집, 뻔뻔한 집주인


첫 주인이 좋은 분들이었어서 세상살이가 쉽게 느껴졌던 걸까. 새로 이사한 집의 주인 노부부도 인상이 좋고 인자해 보여 좋은 사람들이겠거니 했다. 젊은 남매가 둘만 들어와 산다고 하니 부모님이 안 계신 줄로 오해를 했는지 안쓰러워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기특해한다.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뿐.) 모아둔 돈을 학비로 다 써버려 계속되는 반지하방의 굴레. 햇볕 포근한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넓어서 좋았다. 욕실 천장에, 냉장고 뒤에, 벽장 뒤에, 곰팡이는 있었지만 집이 넓어서 좋았다. 곰팡이랑 하루 이틀 살아본 것도 아니니.

고장난 보일러는 누가 고쳐야 할까?


그런데 1년쯤 지냈을 무렵 보일러가 고장 났다. 위층으로 올라가 주인 부부에게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말했다. 영감님이 말하길, 집에 사는 사람이 고장 냈으면 그 사람이 고쳐야지, 하는 것이다. 돈을 들여서 직접 고치라는 소리다. 나는 당연히 집주인이 고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졌다. 영감님은, 여태 10년을 썼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네가 쓰다가 망가뜨린 것이니 네가 고쳐라, 하는 식이었다. 나는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다, 그럼 앞서서 9년 동안 이 보일러를 사용한 사람들을 찾아서 수리비를 공동으로 내기라도 해야 하는 거냐고 따졌다. 마음대로 하란다. 영감님은 더 이상 대화도 하기 싫은지 시선을 회피하고는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나는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억울했지만 이런 일로 법적 책임을 따져 묻기에는 내가 어리고 무지했고, 괜히 주인 심기를 건드렸다가 쫓겨나서 또다시 새 집을 찾아 방황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지금도 용서할 수 없는 집주인의 만행


그렇게 어둡고 습한 곳에 살다가 드디어 나는 시집가고 동생은 장가가게 되었다. 각자의 신혼집이 생겼으니 이제는 반지하방을 떠날 때가 되었다. 계약 만료까지 며칠 남아있었지만 만료일에 방을 빼기로 하고 우리는 각자의 신혼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월세방에 있던 짐들을 며칠에 걸쳐 하나하나 옮겼다. 나나 동생이나 결혼을 했으니 이제 그 집에는 짐만 남아있을 뿐, 생활하는 사람은 없게 된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짐을 가지러 갔다가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집주인 부부가 거실에서 요를 깔고 떡하니 누워있는 것이다. 계약이 끝나지도 않은 세입자의 집에. 한겨울에 조금만 데워도 가스비 폭탄이 떨어지는 그 집에서, 우리 남매도 시도해보지 못한 절절 끓는 온도로 난방을 해놓고서.

귀중품을 훔쳐야만 도둑질이 아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인 부부는 쭈뼛거리더니 오늘 보일러 수도관 점검을 한 터라 시험 삼아 한번 가동해본 거라고 변명했다.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린가. 그걸 왜 연락도 없이 허락도 없이 아무도 없을 때 함부로 하는가. 돈을 주고 집을 빌린 이상 이 집은 아직 내 집인데 집주인이라는 이유로 이래도 되는가. 도둑질도 이런 도둑질이 없다.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차마 화낼 수 없었다.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하고, 상대는 노인이고, 마지막 인사하는 마당에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주인 부부가 나가고 나서 펄펄 끓는 바닥을 만져보았다. 동생과 사는 동안 난방비를 아끼느라 한 번도 이토록 뜨겁게 방을 데운 적이 없었는데...... 달아오른 얼굴은 화 때문인지 난방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화를 냈어야 했다


드디어 만료일. 웃는 얼굴로 인사하려 애썼지만 주인 얼굴을 다시 보고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느라 혼났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보증금도 까버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 모두 돌려받았다. 돈을 받은 뒤에 욕을 한 마디 시원하게 쏟아부어줄까 했지만 참았다. 참은 걸 후회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방을 빼고 짐을 챙겨 신혼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어, 이달 월세 안 주고 갔네?"


주인 영감님의 목소리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계약서를 꼼꼼히 봐 두었지.


"계약서 확인하고 전화하신 거예요? 선불이라고 분명히 쓰여있어요."


"어, 그래? 알았어 그럼."


영감님이 전화를 끊었다. '어, 그래? 알았어 그럼'이라고? 아. 나는 왜 욕 한 마디 안 했을까. 왜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을까. 집주인은 그냥 한 번 찔러본 것이다. 혹시라도 눈먼 돈이 들어올까 싶어서. 혹시라도 내가 계약내용을 모르고 있을까 싶어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행복을 빌어주고 싶지도 않은 집주인이다. 전에 살던 집의 주인 부부가 문득 그리워졌다.

까딱 잘못했다가 한 달 치 월세를 더 낼 뻔했다. 월세계약을 할 때는 선불인지 후불인지 써놓아야 한다.




청춘을 위한 엄마의 위로를 듣지 않았다


사실 월세 시절 집주인 에피소드를 두 편에 걸쳐 쓰게 된 배경에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가 있다. 정말로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


어렵던 시절에는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다. 반지하를 전전하는 인생이 싫었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싫었다. 내 일상이 불만투성이일 때,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힘들어도 미래에는 분명히 좋은 날이 와. 그러니까 절망할 필요 없어."


나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은 게 벌써 몇 년이야. 그래서 엄마는 뭐가 나아졌는데? 내가 엄마 나이쯤 되어도 내 삶은 이 모양일 거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고!"

돌아보면 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지긋지긋한 지하방, 밑 빠진 독에 부은 물처럼 모이지 않는 돈, 경제능력을 상실한 부모님. 나의 삶은 영원히 그 안에서 허우적댈 것 같았다. 그랬던 내가, 나와 비슷한 처지의 두 살 연상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의 작은 월세방에서 시작한 우리의 결혼생활은 어느새 햇볕 포근한 빌라의 5층으로 넘어왔다. 은행의 것이기도 하지만 명의만큼은 우리의 것인 우리집. 대출금 갚기가 고단하기는 해도 삶의 질은 옛 시절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좋아졌다. 엄마가 옳았다.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던 엄마의 말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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