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절에서는 샌님의 관상을 봐주십니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3박 4일

by 이해솔

화엄사는 저녁 8시 무렵부터 불이 꺼졌다.


나는 절까지 와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일찍 잠을 청했다.


뎅 - 뎅 -


한참 잠에 취해 있는데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이게 무슨 소리지 싶다가 본능적으로 새벽예불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1분 정도 고민하다가 쏟아지는 잠을 못 이겨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 공양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절에서는 새벽예불과 아침공양을 중요시한다는 말씀을 어제 원주스님께 들었던지라, 염치없지만 아침공양이라도 챙기자는 생각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스님들은 거의 식사를 마치셨고, 비어있는 테이블 한 곳을 차지하고 산나물 비빔밥을 해 먹었다.


그리고는 씻고 절을 거니는데, 원주스님께서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 서울에서 오신 샌님께서는 예불까지 빠지고 오늘 할 일이 많으신가?"

"저는 아무것도 계획하고 오지 않아서 남는 게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는 새벽예불도 참석하시게. 그리고 오늘 쉬다가 점심 즈음에 일손 좀 거들어주겠나?"

"당연하죠 스님. 마당청소를 할까요?"

"아니다. 서울에서 온 샌님게 어찌 그런 걸 시키겠나."


나는 듣다가 모든 대화가 '샌님'으로 귀결된다는 걸 눈치채고는 항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스님 제가 왜 샌님입니까? 이래 봬도 카페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군대도 육군을 다녀왔는걸요."

"샌님에게 샌님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하는가. 그래도 서빙 경험이 있다니 그럼 오늘 기대해 보겠네."


화엄사에서 1년에 한 번 구례시 주민들에게 무료로 떡국을 나누어드리는 '떡국 공양'행사를 하는데 그게 마침 오늘이란다.


얼떨떨하게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오늘 기필코 샌님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지.'


오전 동안 원주스님과 접객실에 앉아, 화엄사에서 재배한 녹차를 마시며 차담을 나누는데 스님은 걸그룹 '티아라'를 좋아하셨다. 그 이유는, 레트로풍 노래와 춤이 스님이 출가하시기 전에 즐기던 음악과 비슷하다고 하셔서다.


속으로는 무슨 스님이 걸그룹을 좋아하나 싶었지만, 출가 전에는 일본에서 유학도 하시고 음악에 심취하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사연이 있겠지 싶었다.


떡국 공양 시간이 되어 함께 내려간 구례 시내에서 거의 전문가처럼 떡국을 신속 서빙 후 친절한 미소까지 보여드린 나는 화엄사로 돌아와 원주스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샌님이 이렇게 똑 부러지는 게 이상한데? 내가 잘못 봤나?"


그리고는 한참 나를 쳐다보시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듯 사주까지 물어보셨다.


"아이고. 내가 귀한 분을 못 알아봤구나. 잠시 여기 있거라."


그러고는 화엄사로 봉사활동을 온 학생까지 불러 나에게 인사를 시켜주시는 게 아닌가.


"앞으로 귀하게 되실 분이니 친해져 두거라."


나는 샌님도 싫었지만, 금칠도 부담스러웠던지라 시뻘건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스님. 샌님이라고 놀리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귀하게 될 거라 그러십니까?"

"내가 볼 때 너는 분명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니, 무얼 하든 믿고 원하는 대로 하거라."


감사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누워 생각하니, 나에게는 진로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지만 이 말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누구나 이 말 한마디면 될 거라 싶었다.


'무얼 하든 믿고 원하는 대로 하거라.'


계곡으로 가서 발을 담그고 다시 생각했다.


'내가 귀하게 될 거래.'


힘든 표정으로 서울에서 도망치듯 내려온 지리산에서 내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본문은 2013년의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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