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규모에 숨어 있는 의미
기업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나 숫자에도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기로 하자.
다음 표는 미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의 규모를 비교한 것이다. 시기별 상황 차이를 피하기 위해 일본경제가 잘 나가던 1980년대말 시점을 선택하였고 자동차와 전자 업종의 간판기업 GM과 도요타, GE와 히타치의 매출액, 종업원수, 주주수를 대비하였다.
이 표에는 중요한 특징과 재미있는 사실들이 적지 않게 숨겨져 있다. 우선 매출액 규모로 볼 때 일본기업의 매출액은 미국기업에 비해 약 절반 가량에 해당한다. 당시 일본기업들이 한창 잘 나간다고 했는데 규모면에서는 아직 미국기업의 반토막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기업의 실력이 그 정도인가, 아니면 규모확대를 하지 않는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기업규모를 종업원수로 보게 되면 더욱 재미있는 사실이 눈에 띈다. 일본기업의 매출액 규모가 미국기업의 50% 가량인데 종업원수는 그에 훨씬 못미치는 8%(도요타), 25%(히타치)에 그치고 있다. 미국기업의 종업원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별로 없고 생산성이 낮아서 그런 것일까? 일본에서는 종업원들이 일인당 몇배의 부가가치를 올릴 만큼 우수한 것일까?
주주수에서는 어떤가? 이것 역시 매출액으로 본 회사규모에 비추어 일본기업의 주주수가 미국기업보다 적다. 자본금 자체가 작은 탓도 있겠지만 주주구성상의 다른 특징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일본기업은 주주 일인이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기업의 주주는 적은 주식을 보유하며 빈번하게 사고팔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기업규모 비교는 별 의미가 없다. 기업규모를 결정하는 요인은 그 기업이 속한 나라별로 차이가 나고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의 미일 기업 규모비교는 양국의 ‘기업시스템’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기업시스템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따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세가지 기업시스템의 차이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미국기업은 수직적 통합, 인수합병 등을 통해 관련된 활동을 내부화하려는 동기가 강하고 그 결과 기업규모를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한 기업이 모든 것을 하려 하지 않고 외부화 또는 분사화를 통해 관련된 활동을 분산하며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메카니즘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규모확대의 유인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내부화, 외부화 등의 개념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게 될 것이다.
둘째 미국의 기업시스템은 독립된 법인격을 가진 개별기업들이 중심이 되고 있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하나의 기업이 자회사, 관련회사, 하청회사, 계열기업, 협력업체 등과 긴밀한 기업간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이들간에 시장거래를 초월한 장기지속적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의 경우 생산 및 판매의 계열화가 현저하여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적은 종업원을 가진 모기업이 협력관계를 통해 많은 매출액을 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주주구성의 측면에서도 기업시스템의 차이가 난다. 미국기업에서는 개인주주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기업의 주주구성에서는 개인주주의 지분비율이 낮고 법인주주의 지분비율이 매우 높다. 이른바 법인자본주의라고 하는 개념은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다액의 출자를 하고 있는 법인주주의 존재로 인해 일본기업의 주주수가 미국기업에 비해 적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도요타나 히타치가 GM과 GE 매출액의 절반 정도라는 것이 꼭 실력차이만은 아니고 굳이 규모를 확대하지 않아도 될만한 사정이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또 일본기업이 매출액 규모에 비해 종업원수가 적은 것은 일본 종업원들이 우수하고 미국 종업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는 점도 설명이 된다. 일본기업의 주주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일본의 주주는 1인당 많은 주식을 갖고 있고 미국의 주주는 소량의 주식을 단기매각의 용도로 보유하기 때문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기업시스템의 차이로 인하여 기업규모의 단순비교는 무의미하다. 매출액이나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발표되는 100대기업이니 500대기업이니 하는 기업순위도 각국 기업시스템의 특성을 무시한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업종별로 또는 해당기업이 채택하는 전략이나 조직의 성격에 따라서도 기업의 규모는 각각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기업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첫 번째 글에서 장황하게 기업의 규모가 갖는 의미를 설명하거나 미국과 일본의 기업시스템을 비교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다. 하나의 話頭를 던져 둔 것에 불과하다. 기업의 규모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업시스템의 차이를 반영해야 하듯이 기업이란 무엇인가, 기업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해서 다양한 논점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시스템으로서의 기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디까지가 기업이고 어디서부터가 시장인가의 문제 즉 기업의 경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기업의 소유와 통제 메카니즘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내부 경영관리상 기업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가 등이 앞으로 다루어지게 될 주요 토픽들이다. 이들의 토픽 하에 관련된 소주제들을 폭넓게 소개하려는 것이 본 시리즈의 취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