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해진 저녁 열 시 반 봉포해변.
후덥지근한 여름밤,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린다.
눈앞에는 캄캄한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밀려오다가 멀어지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나는 모래사장에 털썩 앉는다.
손에 느껴지는 젖은 모래의 감촉이 좋다.
그렇게 하염없이 파도를 바라보면서,
바닷바람을 맞고 있으니 점차 더위가 가신다.
나는 오른쪽 뺨을 손등으로 문질러 본다.
그러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파도도, 바람도, 삼척에 있는 것들은
여전히 모두 그대로 살아있는데...
나는 아닌 것 같다.
"나도 이제 좀 쉬고 싶다..."
수천만 번 속에서 계속 외쳤던 말을 중얼거리자,
목구멍이 막히도록 울분이 차오른다.
손에 느껴지는 모래를 움켜쥐며 검은 바다를
삼킬 듯이 노려본다.
내가 사라지면 슬퍼하는 사람은 있을까?
엄마는... 울까.
그때 핸드폰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린다.
서윤이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꿈에 오빠가 갑자기 나와서 연락해 봤어.
혹시라도 잘까 봐 문자로 남겨.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 지금, 꿈에 내가 나왔다고?
멈칫하다가 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떨린다.
서윤이는 항상 이렇다.
결정적인 순간에 드라마처럼 등장한다.
갑자기 그 아이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내가 건넨 말에, “네…” 하고 짧은 한숨 같았던 대답.
내리깐 속눈썹과 하얀 옆얼굴,
샴푸 향이 은은하게 스치던 긴 머리카락까지.
그리고 서윤이는 처음으로 내 왼쪽 눈썹에 난 상처에 대해 물어봤던 사람이다.
그래서 헤어진 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잊기 힘든 사람이다.
5년 전 2015년.
내가 자주 가던 단골 와인 바 '오아시스'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달의 마지막 주 금요일,
비슷한 시간에 혼자 와서 조용히 와인만 마시고 가는 사람이었다.
보통 그녀는 빨간 원피스에 화장기 없는 피부와 긴 생머리, 흰색 컨버스로우 차림이었다.
그렇게 와인바에서 마주친 지 세 번째 즈음 되는 날이었을까.
우연히 함께 와인을 마시게 되었는데, 뜬금없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예전에 너는 본능에 충실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내가 본 서윤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생각이 참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말을 하기 전에 항상 눈을 내리깔고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말을 하고는 했다.
어쩌면 그날이 아주 오랫동안 참다가 터졌던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뒷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주섬주섬 꺼낸다.
라이터를 켜보지만, 바람이 불어 라이터 불꽃이 계속 꺼진다.
나는 흔들리는 불 주위를 손으로 감싼 뒤, 얼굴을 가까이 대서 겨우 담뱃불을 붙인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마신 후에 후— 하고 뱉어낸다.
'... 내게도 서윤처럼 그런 본능이란 게 있는 걸까.'
바다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크게 한숨을 내쉬어 본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불 꺼진 매장, 검은 창, 검은 천장,
간접등만 켜진 바 테이블.
그리고 검은 옷만 입는 나.
지금은 새벽 세시, ‘느와르’에 혼자 앉아서
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이름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금색 이름표에는 '오너셰프 강도겸'이라고 적혀있다.
이곳은 내가 프랑스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와서 서울 연희동에 차린 비스트로이다.
느와르는 프랑스어로 검은색, 어둠이라는 뜻이다.
남자답고 나답다고 느껴지는 이름인 것 같다.
내 요리처럼 묵직하게 오래 남는 맛과 어울리기도 하다.
사실 이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서윤이가 예전에 가게 차리면 어울릴 것 같다면서 지어준 이름이다.
2017년 가을, 서윤이와 헤어졌다.
약 2년 간의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며 잘 만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꼭 책임지고 싶었고, 다른 이와의 결혼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한 그녀의 마음이 항상 어려웠고,
내가 그녀를 위해줄 때 그녀는 언젠가부터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말다툼이 잦아졌고, 그녀는 나에게 "헤어지고 싶다"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여러 번 설득했지만,
이별을 막을 수 없었다.
이별 후 다음 해 가을,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프랑스로 떠났다.
당시엔 가진 돈이 많지 않았지만,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조금씩 저금해 둔 돈과 학생 때부터 꾸준히 모아 온 적금을 털어 항공권을 끊었다.
언젠가 서윤과 결혼하는 데 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금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한국에서 어떻게든 멀리 떠나고 싶었다. 새로운 곳에서 그냥 요리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낯선 향이 가득한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제야 해외에 온 것을 실감했다.
마침 예전에 함께 일하면서 친해진 형이 파리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형의 소개로 현지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엔 언어도 낯설고 모든 게 서툴렀지만, 묵묵히 일하면서 미슐랭 스타 밑에서 경험을 쌓게 된 것이 나름 기뻤다.
그 기간 중에 불어 실력은 별로 안 늘었지만, 일하는 동안 요리 실력은 꽤 늘었다.
그래도 파리에 먼저 와 있던 친한 형이 있었기에 그나마 외로움은 덜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1년이 최대였다.
일하기 위해서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엄마가 통풍 때문에 누워 있다는 말에 더 미룰 이유도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내 요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만의 요리 공간.
비스트로를 차리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다.
워킹홀리데이로 모은 돈만으론 전체 비용의 20% 정도밖에 충당이 안 됐다.
결국,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엄마가 내가 가게를 차리려는 걸 알고 나서,
내게 말없이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너 어렸을 때부터 모아둔 거야.”
통장엔 오천만 원 정도가 들어 있었다.
숫자가 또렷하게 박힌 그 잔고가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나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죄책감을 덜기 위한 거였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엄마의 도움 덕분에 나는 비스트로 ‘느와르‘를
무사히 개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에 문을 연지 몇 주 뒤,
거짓말처럼 코로나가 터졌다.
오늘 밤바다를 보고 오니까, 프랑스에서 성재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 프랑스로 건너간 삼십 대 중반의 이민자 셰프였고, 밤마다 작은 술집에 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곤 했다.
주름진 눈가 덕분에 서글서글해 보였으며 은근히 뼈 있는 농담을 잘했다. 자주 입는 낡은 체크 셔츠에는 늘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내가 그를 "루이 형"이라고 부르자, "야, 나는 솔직히 오랜만에 한글 이름 듣고 싶다. 스무 살 때 네가 나한테 불렀던 것처럼"이라고 말해서, 나는 그를 "성재 형"이라고 불렀다.
그날도 우리는 오래된 조리도구에 불을 지피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날따라 힘든 하루를 보낸 터라, 삶이 왜 이렇게 고단하냐며 죽겠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성재 형은 잠시동안 연기를 가만히 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자살은... 자신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하게 되는 거야. 자아가 생겼는데 감당할 힘이 없으면, 그때 사람은 무너진다.”
그때는 그 말이 어려웠는데, 왠지 오늘은 그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와인 셀러에서 2018년 산 카테나 말벡 레드와인 한 병을 꺼낸다. 나는 커피도 와인도 묵직한 쓴 맛이 있어야 한다는 주의이다.
그래야 뭔가 마시는 것 같다.
말벡 와인은 타닌의 강렬함과 거친 느낌이 있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다.
와인 병의 어깨 부분을 잡고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를 딴다.
카테나 자파타.
아르헨티나 와인을 세계적으로 알린 와이너리.
이탈리아 이민자가 프랑스에서 묘목을 들여와 자연적 조건을 극복해 내면서 와인을 생산한 곳이다.
1991년, 미국으로 처음 수출한 이후부터 미국의 와인 애호가들에 의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1991년은 내가 태어난 해이다.
그래서인지, 힘들 때 이 와인을 마시면 그나마 좀 나아진다.
한 병을 몇 시간 동안 천천히 마시다 보면,
단단하고 거친 맛도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내 마음도 취기와 함께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다.
잔을 들어 검붉은빛 와인이 찰랑이는 것을 바라본다.
문득 아까 본 검은 파도가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진다.
피처럼 검붉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다.
짙은 타닌이 입 안을 묵직하게 적신다.
목구멍을 지나 배 안에서 뜨끈한 느낌이 퍼진다.
블랙베리, 자두, 스파이시한 느낌, 희미한 흙냄새,
은은한 바닐라 향의 피니시.
나도 모르게 울컥함이 올라온다.
그대로 얼굴을 테이블에 숙이자 울음이 터져 버린다.
짐승처럼 숨 죽여서 끅끅거리는 소리를 낸다.
결국에는 별것도 아닌 와인 한 잔 앞에서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구나.
하지만 이제야 나를 조금 알 것 같다.
말을 안 해서 나를 몰랐던 게 아니라,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믿어버렸던 거다.
그들도, 나도.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창작소설 #연재소설 #정체성 #사랑 #고립 #경계 #경계에선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