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돌아온 마지막 주 금요일,
나는 연희동 'Oasis Wine Bar'를 찾아갔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고,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연희동의 밤공기에는 와인 셀러처럼 서늘한 기운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거리를 구경하다가
오아시스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열 시쯤.
여전히 오렌지색 풍등이 나를 반겼고,
실내는 밖과 달리 적당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늘 앉는 바 테이블 자리로 향해,
글라스 레드와인을 한 잔을 시켰다.
품종은 메를로.
이곳에 처음 왔던 날, 귀부인 이름 같아서 골랐다가
완전히 취향 저격 당한 와인이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감촉, 혀 전체에 남는
달큰한 여운... 그 점이 내 마음에 딱 들었다.
매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손목으로 천천히 돌려보았다.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어색했겠지만,
직접 경험이 없어도 간접 경험이 있었기에 덜 낯설었다.
그나마 와인바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빛의 성전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 덕분에 다큐멘터리와 책을 가까이했던 나는 생각보다 새로운 문화에 대해 웬만한 것은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내 오른편에 한 자리를 비우고 앉아 있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고개를 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했다.
대수롭지 않게 나도 그가 한 방식처럼 가벼운 인사를 건넸고, 이내 눈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다.
내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또 오셨네요... 하하."
어색한 너털웃음을 지은 뒤에 그는 자신 앞에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다부진 체격과 두툼한 손, 까슬해 보이는 수염자국,
짧은 반곱슬머리, 검은색 가죽재킷과 청바지.
왠지 투박해 보이는 남자였고,
나보다 나이는 조금 더 많아 보였다.
그의 앞에는 멜론 위에 얇은 고기와 치즈가 올라간
안주와 말벡 레드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메뉴판에서 봤던 '프로슈토 앤 멜론'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와중에 '하몽은 먹어봤는데, 프로슈토는 다른가?' 하고 생각이 들었고, 곧이어 "잠깐만, 내가 저 사람을 전에 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내 머릿속의 물음에 응답하듯이 말했다.
"같이 먹어요."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거리자, 그가 덧붙여 말했다.
"오늘은... 혼자가 좀 힘들어서 그래요."
그 순간,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그의 눈을 봤다.
충혈된 눈에 아픈 감정이 서려 있었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곤두서 있는 나였지만, 오래 아파본 사람은 눈에서 티가 난다.
어떤 아픔을 오래 견뎌본 적 있는 어딘가 서늘하면서, 그늘지고 그윽한 눈이었다.
거울 속의 내게서도 본 적 있는 눈빛이라... 나는 안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는 말이 적을 것 같은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결국 갈등하던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그의 와인 잔을 바라보면서 혼잣말하듯 조심스레 말했다.
"힘든 사람한테 와인은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웃음기를 머금은 말투로 말했다.
"아, 그게 제가... 독주는 안 마시거든요."
나는 그 대답이 조금 의아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이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당한 정보만 주고받았다.
그의 이름은 강도겸.
나이는 스물다섯 살, 직업은 요리사이며,
연희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내 나이를 알게 된 그는 말을 놓아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것저것 대화를 나눴지만,
내 기억에 가장 남은 대화는 이거였다.
간만에 외부인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풀린 나는,
마음에 오래 묵혀 있던 고민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예전에, 너는 본능에 충실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게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싶어서... 그 말이 아직도 마음에 계속 남아 있어요."
그는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 톡톡 치며 생각하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뭘 느끼는지보다,
뭘 하는지가 더 중요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도 뭔가 힘드니까 나한테 그런 얘길 하는 거겠지.
그렇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거야."
"음... 그 사람 말이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따지는 것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 정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나는 그의 말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눈썹에 조금 힘을 주면서 다시 한번 질문했다.
"비슷해.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말이야.
그 사람 말이 너한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정하는 것도 결국 네 몫이야."
"음... 맞는 말이네요."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 순간, 괜히 내 과거를 들킨 것 같아 속으로 뜨끔했다. 눈이 이미 동그래졌던 것 같기는 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되물었다.
"뭐를요?"
"그 사람 말은 중요하지 않아.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중요한 거지."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그의 말을 몇 초간 곱씹었다.
"저는...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요."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도겸 오빠와의 첫 만남이다. 그는 나의 자세한 상황을 캐묻지 않고도 가장 필요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성적이면서 무뚝뚝한 그의 방식이,
어쩐지 안심이 됐다.
11월 말 금요일.
오아시스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술이 많이 취해 내 앞에서 울었고,
나는 별다른 질문 없이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에게 내 이야기를 조금 더 솔직하게 꺼냈다.
빛의 성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부모님과 다니는 종교는... 일반적인 곳은 아니에요."
그렇게 털어놨다.
그는 언제든지 결심이 서면 나오라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한 달간의 고민 끝에 나는 탈출을 결심했다.
그렇게 오아시스로 향하는 기묘한 일탈은
다섯 번으로 일단락되었다.
회상을 끝내자 버스에서 이번 정거장에 대한
안내음이 흘러나온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하차 벨을 누른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그의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겨 본다.
연희동의 대부분의 가게는 셔터를 내린 채 조용하고,
간간이 남은 불빛들만 골목을 비추고 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금요일 밤.
2015년 12월 25일... 하필이면 성탄절이다.
오늘도 봉사를 가신 부모님은 내가 집에 영영 안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그런 생각에 뜬금없이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그의 대화 방식은 늘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질문은 마음속에 씨앗처럼 심어지고,
어느 순간 스스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덕분에 이런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게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손이 시려 짐을 잠시 내려놓는다.
발 밑에는 캐리어 하나, 큰 버킨백 하나, 마트 봉투 두 개가 놓여 있고, 안에는 소지품들이 가득 들어 있다.
벌게진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 녹이고, 양손을 부지런히 비벼 본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도겸오빠'라는 이름이 화면에 떠 있다.
"혼자 짐 옮기는 거 괜찮았어? 일만 아니면 같이 갔을 텐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괜찮아. 일주일 전부터 조용히 정리해 놔서 금방 챙겨 나왔어. 지금은 오빠 집 다 왔어."
"아, 다행이다. 일 마치고 빨리 들어갈게.
비밀번호는 7531이야."
"응, 알겠어."
전화를 끊자, 참았던 감정이 터지면서
말 없는 눈물이 흐른다.
통화 중에 살짝 떨리던 목소리를 도겸 오빠는 다행히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혼자서는 잘 참아내던 나였는데,
"괜찮아?"라는 말은
항상 눈물을 흐르게 만드는 신기한 마법 같다.
내 생각보다 난 참 여리구나…
요즘 들어 자꾸 깨닫고 있다.
어쨌든,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1월부터는 얼른 일부터 구해야겠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방송 작가 일...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겨울밤 골목 끝에서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선 나는, 내리기 시작한 눈을 올려보며 시린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본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기분. 하지만 새로움은 낯설고,
설레기보단 허전하고… 조금은 두렵다…‘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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