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헤드셋을 쓰고, 작업용 목장갑을 낀 채 전구를 체크하는 중이다.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더운 숨 때문에 숨 쉬기가 힘겹다.
귀에서는 클래식과 일렉이 혼합된 음악이 들려 온다.
<Nils Frahm – Says>
우연히 알게 된 음악인데, 조금 가라앉는 멜로디로 시작해 반복되는 비트 위에 사운드가 점점 강렬해진다.
일할 때는 가사 없이 반복되는 음악이 집중하기 좋다.
보통 작업할 때는 멜로디와 비트가 어우러진 전자음악을 듣는 편이다.
지금 내 발은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다.
지면에서 떨어져 균형을 잡으려 하다 보니
묘하게 현실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장갑 낀 손끝으로 전구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정한다.
빛이 움직이며 설치물에 반사되고, 눈이 부셔 실눈을 떠본다.
이곳은 몰입할 수 있는 나만의 작업 공간이자 전시 공간이다.
나는 이 공간에서 한 달간 선보일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전시회의 제목은 '비어있는 것들에 대하여(On Empty Things)'이다.
나는 사물들을 다루며 틈을 만들고, 그 공간에 빛을 담고, 순간들을 전시하려 한다.
빈 곳에 머무르는 빛과 공기, 그림자의 찰나를 전시하고 싶다.
비어있는 것들은 언제나 한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빛과 그림자, 공기를 담아내며 항상 같은 곳에 있다.
나는 지금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을 눈으로 찬찬히 보고 있다.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될 구조물은 높이 2.4미터짜리
철제 틀 위에 아크릴 판이 얹힌 형태이다.
그 위에 물방울처럼 생긴 작은 전등들이 매달려,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반사된 빛이 바닥과 벽을 따라 부서지듯 흔들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철제 구조물 틈 사이로 반사되는 빛들이 어른거리며 겹쳐지다가 나눠지고 있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통역사가 내 앞에서 입을 벙긋거리고 있다.
내가 헤드셋을 목에 걸자 이내 그녀가 다시 말한다.
“서진 씨, 괜찮으시면 이제 동선 체크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다리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바닥에 발을 딛고 나서 손에 낀 목장갑을 벗어 허리춤에 낀다.
음악이 사라지자 현실의 감각이 다시금 느껴진다.
전시 공간에 구둣발 소리가 울리고, 밖에서 지나가는 트램 소리, 낮은 독일어 속삭임, 조명의 미세한 전자음까지 생생하게 들린다.
“서진 씨, 이 분이 이번에 큐레이터를 맡아주신 마티아스 뵈르너예요.
온라인으로 몇 번 미팅은 하셨지만, 직접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시죠?”
온화한 미소를 띤 그녀가 옆에 선 남자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살펴본다.
마른 체형, 검은 터틀넥에 재킷을 걸친 차림.
그는 연한 금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둥근 안경 너머로 내 쪽을 주시하고 있다.
침착한 눈빛 너머로 작업 공간을 꼼꼼하게 훑는 기색이 느껴진다.
화면으로 몇 차례 마주했던 인상과 달리, 실제로 보니 그의 눈빛은 훨씬 날카롭다.
이번에는 그녀가 큐레이터와 독일어로 무언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내 쪽을 돌아보며 덧붙인다.
“서진 작가님, 실물이 훨씬 멋있으시다고 하시네요.”
그녀는 말을 전하며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그와 눈을 마주친다.
"Guten Tag."
그가 독일어로 구텐 탁이라고 인사를 전한다.
다행히 인사말은 알아서 나도 똑같이 "구텐 탁"이라고 인사한다.
그의 눈빛에서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맹수의 집요함이 은근히 묻어난다.
그 시선이 꽤나 예리하면서 강렬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조금 굳어 버린다.
내가 전시하는 사람인데 어울리지 않게 왜 긴장하는 거지? 침착하자.
이곳을 찾게 될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가볍게 감상한다면, 전시 주제로 왜 하필 빈 공간을 택했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큐레이터를 통해 작품들의 설명을 듣는 다면,
조금은 내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I'm glad to see you.”
나는 그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만나서 기쁘다는 인사를 한다.
독일어는 아직도 서툴지만, 간단한 영어로 대신 소통하는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
큐레이터가 내 인사에 화답으로 단단한 손을 건네며 악수를 하더니,
검지손가락으로 안경을 올리고 나서, 천천히 몸을 돌리며 한마디 한다.
“So... shall we start?”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먼저 살펴본 전시장 입구의 벽에는 전시명이 또렷하게 박혀 있다.
그 아래에는 작게 이번 전시의 핵심 문구가 적혀 있다.
《비어있는 것들에 대하여 / On Empty Things》
“비어있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항상 거기 있을 뿐이다.”
그 문구를 읽으면서 전시의 주제에 대해서 독일어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도 속으로 다시 한번 이번 전시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내가 선호하는 전시 방식은 한 겹의 투명한 벽을 만들고, 관람자가 그 너머의 작품을 한 단계 거쳐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곳곳에 플랙시글레스를 세워, 빛의 굴절과 반사를 유도한 작업물도 많다.
햇빛은 맨눈으로 바로 보기 힘들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달빛은 은은한 것처럼...
전시관 내부의 조도는 전체적으로 낮추고 조명을 통해 작품에 집중하도록 연출한다.
그렇게 나는 관람자에게 안전한 경계를 만들고,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할 수 있는 시선을 마련한다.
천천히 이들과 함께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자,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보인다.
빔 프로젝터가 작동하면 벽면에 놓인 둥근 유리잔들 위로 영상이 비치는 설치물이다.
누군가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침묵하는 얼굴들이 잔 속에 희미한 잔상처럼 겹쳐 맺힌다.
그 모습이 램프에 갇힌 지니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형태의 유리잔들을 지나자, 실린더형 벽 구조물, 플랙시글레스로 둘러싸인 빈 의자들을 차례로 이어진다.
모든 작품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반짝이며, 조용한 기시감을 만들어 낸다.
앞장선 두 사람이 가장 안쪽 편에 있는 이번 전시의 메인, 높이 2.4미터짜리 구조물 근처에서 다다르자 잠시 멈춰 선다.
"이번 전시장은 전체적으로 조도가 낮고 분위기가 부드러운 편이네요."
통역사가 독일어로 말하는 큐레이터의 말을 나에게 전한다.
"네, 그렇죠."
이런 식으로 독일어로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 가끔 통역사가 나에게 질문을 던지면,
'네'라고 짧게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면 오늘 할 일은 끝이다.
몇 달 전부터 전시에 대한 내용을 온라인상으로 소통해 와서 전시장과 작품 확인은 얼추 끝마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통역사와 큐레이터가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서진 작가님,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일정은 전시가 시작되는 월요일이죠?”
통역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약간 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번 모양으로 묶은 여자이다.
세월이 느껴지는 희미한 주름이 미간과 얼굴 곳곳에 있지만, 그녀는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 우아한 분위기가 든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금빛이 섞인 머리카락과 동서양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이목구비는 그녀가 혼혈이며 오십 대 정도의 나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네, 월요일입니다. 시간은 그대로 열 시부터 시작이고요. 잘 부탁드려요.”
나는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그리고 그녀가 인사 후에 큐레이터와 돌아서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하늘색 블라우스, 남색 슬랙스, 검은 단화.
문득, 그날의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는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에 홀연히 떠났다.
아마 저 통역사 분과 비슷한 나이겠지...
흐리고 떨리는 눈.
그 눈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힘없는 실크 블라우스,
발목까지 사락거리는 긴치마,
얇은 손목과 하얀 얼굴.
그때 엄마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진아, 미안해. 엄마 이해해 줄 수 있지?'라는 말을 남기고 가서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괴롭게 만든 걸까.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든다.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 나는 왜 이 일을 하게 된 걸까?’
떠난 자리를 늘 바라보며 살아서일까.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람보다 사물을,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것을,
차 있는 곳보다 비어 있는 곳을 가까이하며 살고 있다.
엄마는 "말보다 몸짓이 더 진짜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했지만,
"이해해 줄 수 있지?"라는 말만 남긴 채 결국 나를 두고 떠났다.
붙잡고 싶었지만 흩어져버리는 사람을 그 후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되도록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않는 직업을 원하게 되었고,
결국 사물과 공간 안에서 세계를 만들어내는 이 일을 하게 되었다.
사람의 말과 몸짓이 아닌, 빈 공간은 그 어떤 말과 몸짓보다 더 솔직하다.
언제나 지나가고 흐르는 것들을 담는다.
말은 늘 흩어져도 빈 공간은 그대로 존재한다.
움직임은 변화해도 빈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야 조금은 나를 알 것만 같다.
... 어쩌면 그 빈 공간은 내 마음이었던 것일까?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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