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진행되는 전시 기간 중 첫째 주,
목요일 저녁 아홉 시.
나는 전시 종료 시간에 맞춰 뒷정리를 위해 전시장에 들어서다가, 아직 나가지 않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멀찍이 떨어진 작품 앞에 한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에 잠긴 표정.
질끈 묶은 긴 생머리, 진청색 스트레이트진, 소매를 걷은 연회색 셔츠 차림...
아무 말없이, 한 작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빛을 받는 얼굴은 고요하지만, 묘하게 살아 있는 눈동자가 먼 거리에서도 느껴진다.
조명이 낮게 깔린 전시장 안,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바닥을 밟을 때마다 미세한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잔향처럼 퍼진다.
그녀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비누향과 은은한 꽃 향기.
그때,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있다가, 내심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혹시… 서진 작가님 아니세요?”
조심스러운 말투지만,
웃음이 서린 얼굴과 눈빛에는 확신이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맞습니다.”
그녀는 안도한 듯 싱긋 웃는다.
그 웃음이 흐린 날씨의 베를린과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 따뜻하다.
순간, 나는 그녀의 웃음에서
이상하리만치 '정지된 감각'을 느낀다.
익숙한 고요 속에 낯선 일렁임.
그녀는 어깨에 멘 에코백에서 가죽지갑을 꺼내더니,
안에 있던 명함 하나를 나에게 건넨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서윤이라고 해요.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는 인터뷰 작가고요.
지금은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인 예술가들을 찾아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요.”
'이 여자, 단정하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분위기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받아 든 명함을 훑어본다.
ION 다큐멘터리 작가 이서윤
'International Observer Network
- 경계를 넘는 이야기들'
그녀가 이러한 내 일련의 행동을 기다리듯 멈춰있다가 이내 말을 잇는다.
“이번 다큐 마지막 일정이 독일이라…
사실 이번 전시회 소식 듣고 꼭 오고 싶었어요.
직접 작가님을 뵐 수 있어서 정말 기쁘네요.”
작은 주저함도 없는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이다.
그녀의 말은 준비한 것처럼 유려하게 흘러가지만,
눈빛만은 정말,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것 같다.
이 사람은 자기 일에 진심으로 열정 있는 사람인가?
“그런데…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좀 전과 다르게 그녀가 우물쭈물 멈칫거리며 말문을 연다.
시선은 벽면에 설치된 빔 프로젝터로 사람들의 얼굴이 맺히게 한 유리잔들을 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고 대뜸 질문한다.
“혹시, 프리다 칼로 아세요?”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는 마음이 들어
살짝 눈썹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녀가 또다시 바라보는 곳은,
역시나 빔프로젝터가 사람들의 얼굴 영상을 빈 유리잔 위에 쏘고 있는 설치물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자기 몸을 안에서부터 찢어 보여주는 사람.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강인함...”
그녀는 나의 작품을 꿰뚫어 보는 듯이 진중한 눈빛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감상에 몰입한 그녀의 눈빛에는 어딘가 닿지 않을 듯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프리다 칼로.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고,
예술을 놓지 않았던 멕시코의 여성 화가...
그녀의 전시회에 몇 년 전 갔을 때, 전시관 벽에 적혀 있던 문구가 생각난다.
'결국 우리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견딜 수 있다. - 프리다 칼로'
그 문구가 떠오르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묘하게 마음이 일렁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음... 왠지 이 작품에서 외로움이 느껴지거든요.
영상 속 사람들은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면서 맺혀있는데, 금세 사라지고 또 다른 표정이 뜨기를 반복하니까요."
"음, 그게 프리다 칼로랑 무슨 상관이 있죠?"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묻는다.
내 날카로운 가시를 최대한 눕히듯 낮게 눌러낸 목소리로.
"작가님의 마음을 옮겨서 보여준 것 같아서요."
그녀가 내 눈을 그윽하게 쳐다보며 그렇게 대답한다.
나는 잠시 말을 잃고 만다.
그리고, 혹시... 이 차분하고 단단해 보이는 여자 곁에는 이미 오래도록 누군가가 머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친다.
"그렇죠? 왠지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깊은 울림이 느껴져요. 작가님의 예술 세계에 대해서도 꼭 인터뷰하고 싶네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결론지으며, 다시금 눈웃음 짓는 그녀.
마스크에 가려져 있지만, 입꼬리도 분명히 따라 웃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의 여린 부분을 들킨 것 같아서 내심 뜨끔하였지만,
내 작품을 보고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라는 그녀의 말을 듣자, 심장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느낌을 받는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슬며시 흘러나온다.
어쩌면 내 작품을 보고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첫 번째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 감사합니다. 저야 좋죠."
나는 최대한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며 대답해 본다.
하지만 입술만은 비식거리며 자꾸 올라간다.
마스크가 있어서 다행인 순간이다.
"지금 촬영감독님은 일정이 끝나셔서 숙소로 들어가시기는 했는데... 남은 일정이 빠듯해서요. 간단한 인터뷰라도 괜찮아요. 혹시, 오늘은... 시간 어려우실까요?"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괜찮으시면 제 작업실 겸 집에서 간단히 이야기 나누시겠어요?"
"네, 좋아요."
그렇게 그녀와 갑작스러운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집으로 함께 걸음을 옮긴다.
가로등의 불빛을 따라 나를 뒤따르는 그녀의 발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하다니, 스스로에게 놀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나조차 발견하지 못한 나의 결을,
그녀가 나보다 먼저 알아챈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떤 날이었는지도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매년 그냥 흘려보내려고 했던 이 하루에 이 여자가 운명처럼 찾아온 셈이다.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저 누군가와 오랜만에 함께 하고 싶었나?
어쨌든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걷는 귀갓길이
왠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베를린의 여름밤은 조용하지만,
내 마음에는 무언가 시작된 듯이 산란하다.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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