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와 나 사이의 거리 (4-2)

by 산뜻


하루가 끝나고 적막해지는 저녁,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 풍경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다.

휴대폰 화면을 켜 보니 짙은 회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떠 있다.


2020년 10월 3일 토요일 7:32


한국이었으면 개천절.

벌써 저녁 일곱 시 반이다.

전시 준비도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한참을 홀로 작업하다 보니 큐레이터와 통역사가 떠난 지도 벌써 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디테일한 부분을 수정하기 위해 작업물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항상 끝도 없이 욕심이 난다.

드디어 다음 주부터 전시가 시작된다.

한 달 동안 진행되는데,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전시장 건물을 나오면서 입에 담배를 물고 이로 살짝 누르자 '딱' 소리가 난다.

한쪽에 잠시 서서 담뱃불을 붙인다.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고 '후—' 하고 천천히 내쉰다.

뱉는 숨이 조금 불규칙한 듯하다.

수면 부족과 하루 종일 낀 마스크 때문인가 보다.

담배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어느새 켜진 가로등 불빛 덕분에 차가운 공기와 흐릿한 하늘에 어슴푸레하게 주황빛이 퍼진다.

두 번째 연기를 내뱉고 나서 약간 뻑뻑해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떠본다.

가로등 불빛이 더욱 뿌옇게 보인다.

연거푸 담배 연기를 몇 모금 더 마신 후에 바닥에 담배를 휙 던진다.

신발 밑창으로 담배꽁초를 지그시 누른 뒤 가볍게 비벼 불씨가 사그라드는 것을 확인한다.


걸음을 옮기려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흘긋 내 모습을 본다.

전시장 건물 외부에 통유리가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춘다.

광 없는 납작하면서 살짝 코가 각진 민자 가죽 로퍼, 고동색 루즈핏 바지, 단추 두 개를 푼 톤 다운된 남색 옥스퍼드 셔츠. 그리고 나의 애착 가방인 검은색의 포터 크로스백.

오늘의 착장이 꽤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로퍼의 각진 코를 보면서 걷다 보니 주변의 소음에도 무심해진다.

부슬비에 인도는 젖어 있고, 조금씩 튀는 물방울에 바지 끝단에도 물기가 스며든다.

천천히 움직이는 걸음에 맞춰 꿉꿉한 바지 천이 흔들린다.


그때 익숙한 트램 소리가 머리 위를 스쳐간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회색빛 머금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낀 어두운 하늘 아래 지나간 흔적처럼 전선이 얇게 흔들리고 있다.

몇 블록을 더 걷다 자주 가는 테이크아웃 매장 앞에 멈춘다.

무심히 메뉴판을 훑다가 결국 평소대로 주문한다.


"아이네 퀴어비스주페, 아인 브뢰첸 운트 아이넨 잘라트, 비테."


흘러나오는 나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하다.

호박수프 하나, 빵 하나, 샐러드 하나.

나를 위해서 이 문장은 열심히 외워놨다.

매일 같은 음식이어도 그냥 이 정도면 괜찮다.


주문을 마치고 유리문 앞에 멀찍이 떨어져 선다.

하루 종일 쓰고 있던 마스크를 잠시 벗고 머리를 흔들며 손으로 빗방울을 털어낸다.

빗방울이 촘촘히 맺힌 유리문 너머로 흐릿한 내 얼굴이 비친다.

파마끼가 풀리고 살짝 젖어 힘없는 곱슬머리, 그 밑에 씌워진 미색 테의 안경,

무표정한 눈과 다문 입술, 깔끔하면서 조금 날카로운 턱선이 흐릿한 빛 속에 겹쳐 있다.


그리고 내 얼굴 뒤로 보이는 이 도시,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홍대와 비슷한 도시라고 하지만 확실히 다르다.

아직은 이 도시와 나 사이에 유리처럼 얇은 무언가가 있어서 오히려 더 편하다.

낮고 오래된 건물들, 낡은 벽들, 군데군데 보이는 자유분방한 그래피티,

무심하게 스쳐가는 사람들, 흠뻑 젖은 돌바닥, 비 오는 축축한 날씨가 잘 어울리는 그런 도시.

오히려 나에게는 이 도시가 더 맞는지도 모른다.

이 도시도, 나처럼 조금 흐릿한 채로 살아가니까...

낮게 깔린 누런 건물들도 과감한 색감과 터치로 가득한 벽들도 회색빛 하늘도 나에게 조금 무디게 느껴질지라도 날카롭게 다가오지 않으니까.

그래서 더는 날 선 마음을 잡고 있지 않아도 되니까...


문득, 사람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어주는 얼굴.

가만히 있어도 내 옆에서 나를 알아주는 존재가 있다면 마음이 참 편할 텐데.

요즘의 일상은 너무나 조용해서 좋지만, 어딘가 마음 한켠이 늘 텅 비어 있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조용해진 걸까?

나는 이 도시에서 누구와도 제대로 연결된 적이 없다.

익숙해진 것 같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낯선 도시, 낯선 언어, 낯선 공기...

그 사이에 있는 내가 마치 공기처럼 흐릿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조용히 마스크를 다시 쓰고, 포장음식을 받아서 집으로 향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근처의 오래된 아파트이다.

예전에는 노동자 계급이 거주했다면, 요즘은 예술가와 유학생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집 주변에는 갤러리와 책방, 낡은 카페가 곳곳에 보인다.


드디어 집 앞이다.

이 건물은 독일식 오래된 주택 구조, 알트바우 양식.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낡은 벽돌 외벽과 이끼 낀 창틀에 보인다.

내가 사는 곳은 꼭대기인 5층.

엘리베이터는 없다.

나는 숨을 한번 몰아 쉰 후, 오래된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젖은 옷과 머리카락이, 누적된 피로가 몸에 꿉꿉하게 들러붙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다.

오래되고, 불편하고, 조금은 불친절한 공간.

그래도 그런 투박하고 거친 부분이 오히려 편안하기도 하다.

나의 예민한 감각을 덮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5층을 다 오른 후 드디어 집으로 들어오니 긴장감이 한 번에 풀려 버린다.

갑자기 몸에 몰려오는 나른함을 느끼며 무거운 발걸음을 화장실로 옮긴다.

그 순간, 왼발에 아주 짧은 찰나동안 다른 차원을 디딘 듯한 붕 뜬 느낌이 든다.

나는 조금 놀라서 바닥을 보고 눈을 끔뻑거리다가 다시 몸을 움직인다.

마스크를 벗으면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본다.

얼굴에 오래 눌린 마스크 자국이 나 있다.

입술은 평소와 달리 보랏빛이 감돈다.

눈의 흰자에는 붉은 실핏줄이 퍼져 있다.

아무래도 곧 있으면 서서 꿈을 꿀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에 쓴웃음이 새어 나온다.

하긴 전시 준비를 마무리하느라 오늘은 한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 했다.

나는 서둘러서 간단히 샤워를 한다.


그리고 들어선 익숙한 나의 방.

짙은 회색 벽지, 아무 그림도 걸려 있지 않은 벽, 커다란 이중창과 검은색 암막 커튼,

싱글사이즈 침대가 있다.

침대 옆 낮은 다용도 탁자에는 스탠드형 간접등과

반쯤 마신 와인 병, 미술 도록이 놓여 있다.

가장 반가운 건 역시나 침대이다.

하얀 침구가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으으..."


외마디 신음을 내며 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본다.

포근한 침대에 누우니 자연스레 눈이 스르륵 감긴다.

그리고는 오늘 들었던 말을 천천히 떠올려 본다.

매번 혼자 작업을 고수하는 나를 보며, 오늘 통역사가 나에게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서진 작가님은 혼자 있는 걸 참 좋아하시네요.”


사실 그 한 마디가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정말 그럴까? 나는 혼자 있는 게 편해서 혼자인 걸까?

아니면, 그냥 누구와도 함께 하기 어려워서, 혼자가 익숙해진 것뿐일까...

누군가가 나를 잠깐이라도 바라봐 준다면, 그런 누군가를 정말로 만나게 된다면...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서 도무지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다.

오늘 한 시간밖에 자지 못했으니, 다른 생각은 말고 일단 좀 자야겠다.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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