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날 (6-1)

by 산뜻


서진 작가라는 한인 예술가와 브뢰첸을 먹으러

브런치 카페에 와 있다.

카페는 전체적으로 우드 톤이고,

우리가 앉은 곳은 창가 자리.

창문이 위로 45도 정도 열려 있는 개폐형 창가여서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


"아... 어제는 많이 피곤하셨죠?"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으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나에게 넌지시 물으며 눈을 옆으로 흘리는 이 작가는, 왠지 참 여려 보인다.

질문을 던져 놓고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시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흔들리는 눈빛, 조심스러운 손짓에 담긴 마음이

조용하게 보인다.


왼쪽 어깨가 조금 더 내려가 있구나.

왠지 심장이 있는 왼쪽으로 어깨가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많이 쓰며 사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보통의 남자보다 더 예민하고 섬세한 느낌.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같다.

흔들리되 뿌리는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


"서윤 씨, 어제... 인터뷰 말고 마지막 즈음엔… 무슨 얘기했었는지 기억나세요?”


질문하는 그의 눈빛이 어제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다.

전시장에서 봤을 때는 조금 더 예민하고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내가 조금은 편해졌나 보다.

어제 그 키스는... 아마, 술기운에 그런 거겠지?

어제 있었던 일은 그냥 묻어두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아는 척했다가 서로 괜히 불편할 수도 있고.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아무래도 녹음기 들어봐야겠네요."


내 대답에 그는 먼 곳을 보는 눈으로

"아하..."라는 어색한 반응을 보이며 시선을 돌리더니,

입매에 다소 힘을 준채 입을 다물고 몇 초간 정적이 이어진다.


“브뢰첸이 맛있네요.”


이내 그가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간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빵을 한 입 베어문다.

벌어진 입 안으로 송곳니가 조금 보인다.


'이 사람한테 저런 표정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무심한 웃음과 무해한 표정에

심장이 더 빨리 뛰는 듯하다.

이건 위험하다.

착각하지 말자 이서윤.

더 이상 흔들리면서 살 수는 없잖아.

안정적인 삶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잊지 말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없이 브뢰첸을 입에 가져가 한 입 베어문다.

호밀로 만들어서인지 겉은 거칠고 단단한데,

속은 생각보다 부드럽다.

씹을수록 특유의 발효된 밀향이 배어 나온다.

나는 머그잔을 들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그를 힐끔거린다.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릇 위에서 빵을 잡은 손끝의 모양과,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시선은 바깥 멀리에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나른한 눈빛, 조금 서늘한 인상이 묘하게 섹시한 분위기를 풍긴다.

오늘은 리넨 소재의 회색 체크셔츠를 풀어헤치고 안에는 목이 넓게 파인 흰색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다.

그리고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카락과 여유 있는 핏의 검은색 슬랙스...

약간 흐트러지고 느슨한 옷차림이 조심스러운 그의 분위기와 대조적인 느낌이다.

어쩐지 이 사람은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할 것 같다.


‘자꾸만 이 사람을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처음 본 날 경계하던 눈빛, 몸을 움츠리는 듯한 자세, 말끝마다 생기는 침묵의 틈,

손끝으로 갈수록 가늘고 섬세해 보이는 손,

어쩌면 홀로 견뎌냈을 시간을 보여주는 듯한

손등과 팔의 도드라진 핏줄까지.


그의 모든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간다.

그때, 그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질문을 던진다.


"아, 인터뷰 내용 정리한다고 하셨죠?"


"아—, 그건 괜찮아요. 잠시 쉬는 게 더 좋겠네요. 잠깐이면 금방 끝날 것 같아서요. 이거 다 먹고 근처 산책이라도 같이 해요."


나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말을 뱉는다.


"아... 그럴까요?"


"네, 그래요."


우리는 동시에 창 밖을 바라보면서

또 잠시동안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바람에 나뭇잎이 사락거리며 춤을 추듯 흔들리고,

햇빛이 비추는 거리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둘의 침묵 속 고요를 채워주는 주변의 소리가 마치 음악같이 느껴진다.

가만히 있어도 편안한 기분이 들어서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지어진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편안한 기분...'


이후 식사가 끝나고 근처를 걷게 된 우리.

따사로운 햇살 아래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적당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라니,

오늘은 날씨도 기분도 정말 좋다.

산책 중에 빨간 문이 인상적인 소품 샵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건물 예뻐 보이네요. 들어가 볼까요?"


내가 마스크를 다시 고쳐 쓰고, 검지 손가락으로 가게를 가리키며 그를 쳐다본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따라 마스크를 다시 쓴 뒤, 나보다 반 발짝 먼저 앞서 문을 열어준다.

가게에 들어서서 걸음을 딛자 낡은 나무 바닥에서 삐걱 소리가 난다.


가게 안에는 종이 모형 모빌, 다양한 모양의 유리병, 형형색색의 향초들, 자수로 만든 꽃 모양 컵 받침, 도자기로 구운 미니어처들 등이 차곡차곡 놓여 있다.

걸음을 내딛으며 찬찬히 둘러보는데, 가게 안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나무 향과 촛농 향이 기분 좋게 코 끝을 간질인다.

한쪽 벽면에는 나무로 된 엔틱한 궤종시계에서 작은 새가 나와 지저귀며, 이미 한참 지난 오후 12시를 알리고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 샵 안에 있다 보니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


그때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던 그가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춰 선다.

그의 앞에는 회색 귀 한쪽이 접힌 고양이 모형이 있다.

고양이는 마치 이제 막 일어난 듯 얼굴을 비비는 자세이고, 도자기 재질로 손으로 빚어 만든 듯하다.


"귀엽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가 고양이의 접힌 귀를 톡톡 건드린다.


"서진 작가님 닮았어요."


꼼지락대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말이 툭 나와 버린다.


"에?"


그가 행동을 멈추고서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나를 쳐다본다.


"아아, 그 고양이. 작가님 닮았다고요."


나는 얼굴에 열이 화악 오르는 걸 느끼면서 얼버무리듯, 괜히 고양이 모형만 쳐다보며 대답한다.

속으로는 아기고양이 같아서 자꾸만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마음대로 다가갈 수가 없어.

어쩌면 나도 이 사람처럼 고양이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당황한 듯 웃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깊어 보였는데...

그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도겸 오빠>
서윤아, 잘 지내? 아직 독일이려나...
혹시 오늘 저녁에 통화할 수 있을까? 잠깐이면 돼.


나는 다 읽은 메시지를 몇 초간 내려다본다.

시선은 글자 사이 허공에서 맴돌고,

마음이 왠지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이다.

이 이름이 이렇게 낯설어지다니

갑자기 생경한 느낌이 든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뱉어내며 화면을 꺼버린다.


소품 샵에서 나오면서 서진 작가가 구경하는 틈을 타서 구매했던 그와 닮은 고양이 모형을 그에게 건네면서 말한다.


"여기, 선물이에요."


그가 동그란 눈으로 선물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활짝 웃는다.

또 마주한 그의 웃는 얼굴...

부정할 수 없다.

이 사람, 웃는 게 참 예쁘다.

마스크에 가려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볼 수 없음에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 감사해요."


그는 두 손으로 소중히 받아 들더니

연신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제 이별을 말해야 하는데,

속 없이 웃는 그의 얼굴에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이제, 헤어질까요?"


"아, 네. 가야죠..."


"아시다시피 다큐멘터리 인터뷰 일정이 끝나가서,

뵐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아요.

저, 다음 주에 한국에 돌아가거든요."


그는 웃음을 거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조용해진 채 고개를 숙여 바닥만 바라보는 시선.

아무 말 없어도 나는 그의 눈빛에 스치는 쓸쓸함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애써 보지 않은 척한다.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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