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봉 샌드위치와 용서 (7-1)

by 산뜻

공기가 제법 차가워진 늦가을 11월 초

문래역에서 신촌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도겸오빠의 '느와르'로 가는 중이다.

평일 오후 세 시라서 지하철에 자리가 널널하여 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음 정거장이 당산역임을 알리는 전광판을 두 번 올려다 보고,

무릎 위에 다이어리를 조심스레 꺼내서 펼친다.

그리고 다이어리의 가장 뒷 페이지를 열어본다.

그곳에는 도겸오빠와 헤어진 이유에 대해 적혀 있다.


내가 그와 이별한 이유
1. 오랜 시간 함께 해도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이 들어서
2.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것이 서로에게 오히려 짐이 되어서
3. 더 이상 의지하는 내가 아니라, 독립적인 내가 되고 싶어서


부모님과 빛의 성전에서 벗어나 도겸오빠네로

이사했던 그 시절.

그때 그의 주도하에 핸드폰과

핸드폰 번호부터 무리해서 바꿨다.

과거의 세상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위해,

아프지만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렇게 도겸 오빠와 자연스럽게 동거인이자 연인관계가 되었다.

연인이 된 이후부터, 나를 향한 그의 책임감과 걱정은 항상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케어해주려 했다.

게다가 나의 인간관계, 하루의 동선,

직장에서의 생활까지

그는 하나하나 다 알고 싶어 했다.


이별 후 그와의 첫 만남.

독일에서 다큐멘터리 인터뷰 중이었던 지난

8월과 10월에 두 차례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단골손님들을 위한

와인 시음회를 준비 중이라 했고,

나에게 관련 자료 만드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와인시음회에 사용할 PPT 만들기를 돕기 위해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의 가게는 연희동 골목 안쪽에 자리한 작은 비스트로이다.

유리문 너머로 오래된 와인 진열장이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붉은 벽돌과 짙은 월넛 톤 목재로 된 바 테이블,

낮은 주황빛 펜던트 조명이 가게 전체를 은근하게 물들인다.

창가에는 단풍이 다 진 가로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외의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온통 검은색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뜻한 오븐 냄새와 함께,

살짝 남아 있는 점심 손님들의 대화 잔향이 공기 속에 묻어 있다.

도착 시각은 오후 3시 20분.


그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집기를 정리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돌아보며

반가운 웃음을 짓는다.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바빠 보인다.

주방 보조를 돕던 아르바이트생이 최근에 갑자기 그만두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매출이 크게 줄었기에

당분간 비스트로를 혼자 운영할 생각이라고 했다.


나는 오른쪽에 위치한 창가 테이블에 펼쳐진 노트북을 보고 그 자리로 가서 앉는다.

이내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앉으면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삼 년 만에 마주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안,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나는 그의 말에 담긴 무게를 느낀다.

담담하게 뱉은 말처럼 보이지만,

그 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의 인생에 담긴 슬픔과 외로움은 여전히 나에게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과 단단한 어깨, 큼직한 손과 다르게 항상 일자로 다물어진 입매와 날카로운 눈빛에서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정리한 사이인 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한다.


"어디까지 만들었는지 내가 확인해 볼게."


노트북에 이미 열려 있는 PPT를 살펴본다.

하얀 바탕에 고딕체로 '제1차 느와르 와인 설명회'라는 제목이 보이고,

두 번째 장에는 '부르고뉴 와인 = 부드러움?'이라는 글자가 중앙에 떡하니 적혀있다.

그가 의외로 PPT 작업에는 어설프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를 핑계로 나와의 만남을 유도했다는 걸 어렴풋이 직감한다.


나는 메인 슬라이드에 매장 로고와 날짜를 넣고,

품종별 설명에는 사진과 짧은 문장을 배치한다.

와인별 향미 그래프랑 추천 안주도 간단히 추가한다.

시음회 초보자들이 보기 쉽도록 내용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든다.


"오, 역시 이런 건 네가 잘한다니까."


순조롭게 만들어진 결과물을 보여주니 그가 감탄한다.

그의 밝아진 표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평소엔 심각한 인상인데,

참 웃을 때는 해맑아 보인다고.


"다음번에는 그냥 작업해야 하는 자료 있으면 연락해. 굳이 만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웃는 그에게 괜스레 차가운 말투로 선을 긋는 말을 뱉는다.


"아무튼 정 없게..."


그는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린다.


그렇게 노트북을 닫고 나서 그는 나에게 오랜만에

와인 한 잔을 하자고 제안한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대신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달라고 부탁한다.

이후에 그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뽑아서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천천히 입을 열어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와인 품종 좋아하는지 알아?”


"음... 카베르네?"


"왜?"


"과실향이 풍부한 게 네가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


"아니야."


"그럼 뭔데?"


"나랑 처음 얘기한 날 내가 마셨던 와인인데."


"음... 모르겠어."


나는 몇 초간 기다리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의 얼굴에 그냥 답을 말하기로 한다.


"좋아하는 와인은 메를로. 벨벳처럼 입안을 감싸돌고, 마시고 나서도 여운이 남아서.

그래서 메를로는 마시면 알아. 아, 이거 메를로다 하고. 근데 나랑 닮은 애는 피노 누아야.

예민하고 섬세해서... 떼루아에 따라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향을 품어내는 와인. 근데 조금 신맛이 튀지."


"오... 네가 이렇게까지 와인에 대해서 잘 아는지 몰랐는데."


내심 나는 또 실망한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와인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인데...

나 스스로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설명하고 싶고 또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도겸 오빠 앞에서는 항상 욕심이 되어버린다.

역시 도겸 오빠는 나를 잘 몰라.


그는 이어서 요즘 매장 매출이 얼마나 줄었는지에 대해서 나에게 이것저것 털어놓는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잠잠히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한다.

아메리카노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 나는 문득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잠봉 샌드위치 좀 만들어줘!

나도 이만 갈게."


"벌써 가려고?"


"응, 가야지."


"서윤아, 근데 혹시 저번에 밤에 문자 했을 때, 무슨 꿈꿨다고 한 거… 어떤 내용이었어?"


그가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에게 뜬금없이 질문한다.


"아... 그거? 오빠가 메두사를 본 것처럼

갑자기 까맣게 굳어서 돌이 되더니

바다 아래로 끝도 없이 가라앉는 꿈이었어.

저번에 알려줬잖아."


"아, 그랬나."


그가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었는데...

너랑 헤어지고 나서, 내 방식이 너한텐

많이 힘들었겠구나라고 생각했어.

미안했어. 서윤아...."


"그랬구나. 괜찮아."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한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샌드위치 만들어 올게."


그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약 오 분 정도 지나서 잠봉 샌드위치를 포장한 종이봉투를 나에게 건네며 말한다.


"샌드위치 먹으러 또 와. 이 시간에는 한가하니까."


짐짓 아쉬워하는 그의 말투에 나는 손을 흔들며

"잘 지내"라고 인사를 건네고 그곳을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와의 연애 시절이 떠오른다.

마치 유치원생이 된 듯이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케어해주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너는 물가에 내놓은 애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제로는

그가 나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걸 점차 느끼게 되었다.

그는 부모의 역할을 하면서 누군가를 책임지는 일이,

만족을 넘어 삶의 이유가 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것이 그의 사랑 방식이기도 했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그의 방식이

공간 없이 옥죄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리고 점점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집 앞 카페에서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도겸 오빠가 만들어준 잠봉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다.


바삭한 차아바타를 씹어 내자,

이 사이에서 재료들이 점차 잘게 부서지며

갖은 풍미를 자아낸다.

조금씩 섞여가며 조화를 이루는 재료들.

루꼴라, 잠봉, 버터, 홀그레인 머스터드, 치아바타, 토마토, 양파...

샌드위치 속의 햄을 씹을수록, 입 안에 번지는

짭조름하고 은근한 풍미가 오래 전의 기억을 깨운다.


빛의 성전 시절, 은혜 언니와 함께 몰래 하몽을 씹던

그날의 공기와 위선의 웃음이,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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