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날 (6-2)

by 산뜻


서진 작가와 헤어진 후 나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문득 도겸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오후 다섯 시가 지나가고 있다.

한국 시간으로는 밤 열두 시가 넘었을 것이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긴장감이 돌고

괜히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며

‘전화를 마친 후에는 제대로 쉬자'라고 생각한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린 후 도겸오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서윤아, 잘 지내?"


"응,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요즘 힘들어서 와인 시음회를 열려고 하는데,

PPT 작업이 좀 어렵더라고...

내가 그런 걸 잘 못하잖아.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부탁해도 될까?"


"음... 언제 진행할 건데?"


"너 한국 들어와서 도와주면 돼. 급한 건 아니라서."


"알겠어. 일 끝나면 연락 줄게."


"고마워. 아, 그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혹시... 저번에 꿈에 내가 나왔다고 했잖아. 그거, 무슨 꿈이었어?"


"난 답이 없길래 문자 못 봤나 했는데, 궁금했구나?“


“응.”


“기억나는 건, 오빠가 메두사의 눈을 본 것처럼,

검고 단단한 돌처럼 변한 거야.

그리고 깊은 바다 아래로 점점 가라앉았어.

물속에서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수화기 너머에서 몇 초동안 적막이 이어진 후,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실 그날 힘든 날이었거든. 연락 줘서 고마웠어."


"그랬구나. 그래도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그럼 그때 봐."


"그래."


서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예전 일들이 머릿속에 스친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한 장면에 의식이 멈춘다.

도겸오빠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나 만날 거야?"


나는 고민하다가 말끝을 흐리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 아니."


"왜? 왜 아니야?"


"뭐라 해야 하지...

아, 오빠랑 나랑은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나의 답을 듣고 그는 침울해져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속상하네. 난 다시 태어나도 너 만날 건데."


"왜?"


"날 이렇게 이해해 줄 사람 너 말고 없을 거 같아서..."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눈시울에 슬픈 기운을 품고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그 말이 내 마음 한켠을 은근히 눌렀다.

내가 잠시 침묵하자 그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봐. 네가 어려서 그래.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친구다 뭐다 해도,

결국 날 도와줄 한 사람이 중요하단 걸.

주변에 나이 드신 분들 보면 다 그렇거든. "


난 그의 설득에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던 날

잡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보였기에…

나는 왼쪽 눈썹 중앙에 세로로 가로지르는

그의 흉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흉터가 없어지지 않듯이

아마도, 그의 마음도 오래 아플 것이다.

내가 있어도 없어도 그는 아마 아플 테지…

아주 아주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나에게 대답을 졸랐다.

그래서 난 그에게 "응..."이라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야. 오빤 나보다 더 성숙하고

여성스러운 사람 만나.

난 좀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어서…'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나였다.


도겸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

그 책임을 지는 것이 삶의 이유가 되어 버리는 사람.

그렇지만 지친 자기 마음은 모르고 사는 사람.

아니, 모르고 살려는 사람.

너무 아파서 보지 않으려는 사람.

외부로는 예민하게 모든 것을 살피면서도

속으로는 무던하게 다 덮어버리고

꾹 누르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도 상처 많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랬기에 그런 그의 마음을

내가 조금 어루만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동거하고 연애를 하는 동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들으려 하기보단

자신의 의견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도겸오빠와 나는 참 달랐고, 우리는 그걸 이별하며

조용히 그리고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도겸오빠와 헤어지기 1년 전쯤,

그가 쉬는 날이라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나는 잠에 든 그에게 잠시 산책을 다녀온다고 했다.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조용히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놀이동산으로 향했다.

평일 저녁이라 놀이동산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추억의 회전목마 앞에서, 잠시 멍하니 섰다.

나에게는 지갑 속에 가족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놀이동산을 갔던 내가

회전목마를 배경으로 서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신이 났고, 사랑받는 아이였다.

지금은 그때만큼 웃을 수는 없지만,

잠깐 그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만 발길이 놀이동산을 찾고는 했다.


“어디 갔다 왔어?”


저녁 아홉 시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에서 알코올 향이 훅 풍겨 왔다.

그는 원룸 바닥에 우두커니 앉은 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불은 그대로 펼쳐져 있고 옷가지 몇 개는 구석에 쌓인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플라스틱으로 된 접이식 탁자 위에는 얼음이 든 유리 잔과 소주병이 보였다.


“산책했지.”


“혼자?”


얼음을 탄 소주를 한 모금 마신 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날이 서 있었다.


“으응.”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나는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폭발하듯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말투가

귓바퀴를 타고 내 머릿속으로 날카롭게 들어왔다.

잠시 긴장감이 섞인 고요가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왜 전화 안 받았어.”


“… 배터리 나갔었어.”


“서윤아.”


그는 천천히 한숨을 내뱉더니,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핸드폰 줘 봐.”


나는 머뭇거리며 핸드폰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통화 목록과 메세지함, 채팅 어플 등을 차례로 열어보더니 나에게 다시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빨리 솔직하게 말해. 어디 갔다 왔어?"


나는 입이 굳은 듯 뭐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마음이 구겨지고 어둠 속에 잠식되는 기분이 들었다.


"놀이동산 갔다 왔지?”


“……응.”


그가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핸드폰을 던졌다.

순간 손등에 무언가가 스치며 ‘쾅’ 소리가 났다.

나는 "아"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분노가 일렁이는 낯선 눈빛이 보였다.

그 눈 안에는 마치 한 마리의 야생동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둠이 공기 중에 감돌았고 내 심장은 쿵쿵대기 시작했다.


”아, 미안... 내가 원래 이러지 않는데…

그러니까 말 좀 잘 듣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눈썹을 문지르더니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으로

짜증 섞인 말을 이었다.


“거기 위험한 거 알잖아.

벌써 말도 없이 몇 번째야—.

나한테 비밀을 만들면서 그렇게까지 가고 싶었어?

너는 놀이동산 안 가면 죽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그냥 회전목마만 보고 싶어서 그랬어.”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런 이유로?

저번에 안 간다고 우리 이미 약속했잖아.

그럼 그때는 왜 약속한 거야?"


"아, 미안해..."


"너는 미안하다고 하면 다냐?

내가 너 걱정하는 거 몰라서 그래?

잘해주니까 이제 만만해서 무시하는 거냐?”


질문이 쌓여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올라갔다.

도겸오빠는 놀이동산의 기계를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사고의 위험이 있는 요소이었기 때문에

놀이동산 근처도 가지 않았고,

나도 자신처럼 그러길 바랐다.


게다가 내가 빛의 성전 출신인 것이

그에게 큰 불안을 안겨 주었다.

내가 그의 집으로 온 다음 날,

그는 서둘러 나의 핸드폰을 새로 사주었고

핸드폰 번호도 변경시켰다.

혹시라도 그들이 날 찾아오거나 데려가지 않도록

위험요소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항상 주변을 경계했고,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에 그를 이해하면서도

저렇게 공격적으로 말해야 할까 싶어서

마음이 괜히 억울하고 속상했다.


“내 말, 그렇게 무시할 거면 왜 나랑 있어?”


그의 말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나도 그를 따르고 싶고,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방식은 어딘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의 이성적이고 무뚝뚝한 성격이 왠지 편안했다.

작은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의 투박함이

적당한 거리감을 만들어줘서 그게 나에겐

숨 쉴 틈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순간,

나는 알게 됐다.

이 울타리에 들어온 이상,

나는 그의 규율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늘 조여 오는 긴장감 속에서 살았다.


그렇게 조금씩 그 사실을 인정하자,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엔 질문이 피어올랐다.


'과연 내가 이 사람과 계속 함께해도 행복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에게서

질문을 통해 멀어지게 된 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내가 멀어질수록 다정해졌다.

화도 점점 내지 않았고, "그래, 알겠어"라고 수긍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독립적인 삶을 향해갈수록 그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듯했다.

마치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야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사람처럼.


어쩌면 서로 좋아하는 와인이 거친 말벡과

부드러운 메를로였다는 사실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부드러울수록 살아나는 사람이고,

그는 거칠수록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온기를 따라 물처럼 흐르려 했고,

그는 항상 뜨거운 불 속에서

자신을 단련하듯 살아왔다.


과거를 떠올리다 보니 돌을 던진 수면처럼 잠잠하던 마음에 여러 겹의 파동이 인다.

나는 집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어 본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잔상처럼 계속 떠오른다.


하얀 빛의 성전.

오아시스 와인바에서의 대화.

도겸오빠의 흉터.

혼자 가던 놀이동산.

그가 핸드폰을 던진 순간.

그리고 약간 움츠린듯한 서진 작가의 옆모습.

그가 입꼬리를 활짝 올려 웃던 얼굴.

잠결에 느낀 그 사람의 숨결과 입술의 감촉.


순간 목구멍이 막히는 듯하고,

마음에 가득 찬 뜨거운 기운에

숨을 쉬기가 힘든 것 같다.

나는 조용히 셔츠와 청바지를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다.

운동화를 꿰어 신은 뒤,

현관문을 천천히 열고 집 밖을 나선다.

무선 이어폰을 양 귀에 꽂고서

음악 재생 버튼을 누르자,

시끄러운 전자음과 비트가 들리기 시작한다.

지체 없이 이층에서부터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거리로 나서자마자, 숨도 고르지 않고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는 동안은 숨과 박동에만 집중할 수 있다.

생각을 떨치고 몸은 앞으로 달리고 숨만 쉬는 거다.


" Change my pitch up, Smak my..."


가사가 들려올 때 나는 점점 속도를 높인다.

숨이 찰 때까지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비트가 잠잠해지다가 인도풍의 여자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 붉은빛이 퍼지기 시작하며 노을이 지고 있다.


하늘빛과 주홍빛,

붉은 기운이 오묘하게 섞인 하늘이

마치 물감이 번진 팔레트 같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내 마음에

스며있는 것 같기도 하고,

노을 진 하늘이 내 마음을

고요히 어루만지며 다독이는 듯하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나에게 전하며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본다.




※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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