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 애를 좋아했다 (1-1)

by 산뜻


2013년 가을 리온예술고등학교.

철조망 위로 낙엽이 흩날린다.

미처 떠나지 못한 주황빛 낙엽 하나가 철조망에 붙잡힌 채 흔들리고 있다.

학교는 이태원역에서 칠 분쯤 걸어 올라가는 곳에 있다.

담벼락이 낮게 깔린 낡고 오래된 양옥집과 주택이 밀집한 골목을 지나면,

철제 난간이 있는 가파른 언덕길 위로 무거운 철문으로 된 학교의 정문과 이곳을 비추는 CCTV가 보인다.

정문 상단에는 '리온예술고등학교(梨溫藝術高等學校)'라는 음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꽃을 피우는 감성, 온기를 지키는 성장'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가끔은 책가방보다 여행용 배낭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른다.

리온고등학교는 그런 동네 끝에, 조용히 숨어 있다.


나는 셔츠 깃 사이로 스며드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학교의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다.

언제나처럼 단추를 두 개 풀은 흰색 셔츠, 청록색 타이, 쥐색의 교복 바지, 검은색의 포터 크로스백 차림이다.

나는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어 학교의 전경을 바라본다.

언덕 위에 위치한 옅은 베이지색의 건물.

운동장은 없고 옥상 한켠에는 칸칸이 나뉜 화분들과

낙서로 채워진 오래된 벽이 있을 뿐이다.

CCTV가 없는 사각지대인 옥상 귀퉁이의 화분 밑에는

늘 학생들이 몰래 핀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다.


이제 곧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가을이 끝나간다.

그 사실에 조금 후련하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상하게도 '끝'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늘 낯설기만 하다.

시간은 언제나 나보다 앞장서서 흘러가지만,

나는 어딘가에서 지나치지 못하고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서...


리온예술고등학교에는 무용과, 미술과, 연극과, 영상과, 모델과가 있고 별도로 '문학적 감성 수업'과 '방송 현장 실습'이라는 이름의 선택 과목이 있다.

나는 미술과 학생이지만, 오늘은 무용과의 현대무용 수업을 청강한다.

분기마다 자신이 원하는 과의 수업을 자유롭게 청강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감각들이 잠시 섞이는 시간.

그건 창작자이자 예술가로서 나름 기대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서진, 너도 여기 서서 한 번 배워볼래?"


얇은 테 안경을 쓴 마르고 포니테일을 한 삼십 대 후반의 여성. 그녀는 약간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현대 무용 선생님이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미소 지으며 손에 쥔 캠코더를 보여준다.


"오늘 제가 영상 찍기로 해서요."


그녀가 "그래, 그럼" 하고 수긍하며 바로 수업에 집중한다.

ㄷ자 모양으로 거울이 둘러진 넓은 강의실에 희미한 땀내음과 습기가 느껴진다.

이곳에 있는 청강생은 나를 포함해서 총 열두 명.

연극과 다섯 명과 영상과 네 명, 모델과 두 명, 미술과는 나뿐이다.


나와 함께 무용과에 청강하러 오기로 했던 친구 녀석이 "아무래도 영상과를 청강하는 게 낫겠다"라며

나와의 약속을 배신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든다.


청강을 듣는 대신 무용과에 남은 기존 학생은 총 열일곱 명.

청강을 원하지 않거나 혹은 다른 날 청강하기를 택한 학생들이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뻘쭘해진 나는 자연스럽게 영상을 찍기로 한다.


아무리 넓은 강의실이라지만, 선생님을 포함해서 총 삼십 명이다.

청강생들이 주변에서 속닥이는 것을 느끼며, 나 홀로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아, 정신 산만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한 명, 내 시선을 붙잡은 아이가 있다.

흰 피부에 적당한 근육과 마른 몸의 남 무용수.

움직임과 함께 춤을 추는 뻗친 머리카락, 섬세한 손끝, 맑고 반짝이는 눈망울...

많은 사람들의 중심에 서서 유려한 움직임을 잇는 그 아이는 무용과 선생님들의 선망을 받는 무용 유망주이다.

뷰파인더로 그 아이가 턴하고 있는 움직임을 숨 죽이고 바라본다.

화면에 집중하다 보니 괜히 더운 것 같고, 머리가 울리는 듯하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현대 무용 청강 수업이 마무리되고, 수업 종료 인사와 함께 선생님은 교실을 빠져나간다.

청강생들과 무용과 학생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떠나며 어수선하다.

그때, 그 아이가 내 옆을 스치며 교실의 발레 바에 걸어 놓았던 수건을 집는다.

흰 수건을 목에 걸치고 한 손으로 얼굴의 땀을 툭툭 닦아낸다.

나는 괜스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닦고 있다. 그런 나에게 시선이 느껴진다.

흘긋 시선을 옮기자 그 아이의 큰 눈망울이 나를 보고 있고, 이내 싱긋 웃는 얼굴로 내게 뭔가 말하려 한다.


"오늘 영상 찍어줘서 고마워--."


나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술이 먼저 다물린다.


“아, 응...”


나는 입만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그 아이는 내 대답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동작을 이어간다.

수건으로 한 번 더 목덜미의 땀을 닦아내고 내 어깨를 가볍게 스치듯 지나간다.

스치는 순간, 땀에 젖은 옷자락에서 은은한 비누 향 같은 게 난다.

여름의 냄새 같기도 하고, 그 아이가 방금 턴하던 공기 같기도 한 향이 여운처럼 짧게 내 옆의 공간을 감돌고 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면서 천천히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화면 속의 그 아이가 무심해서, 얼빠진 이 표정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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