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 애를 좋아했다 (1-2)

by 산뜻


귀뚜라미 소리가 잔잔히 들리는 여름밤.

나는 장마가 끝나고 간만에 선선해진 밤공기를 느끼기 위해 방충망은 닫은 채로 베란다의 창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우리 집은 삼 층이라서 바깥에서 우는 귀뚜라미, 매미,

가끔은 개구리 소리까지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매연 가득하고 시끄러운 도심이 아닌, 후암동 주택가의 고즈넉한 밤이 좋다.

아버지는 오늘 밤도 역시 들어오시지 않으시고 있다.

뭘 하고 다니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이 취한 채로 어딘가에서 헤매고 계시겠지.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떠난 후부터 늘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무너져 있는 상태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존경심이 좀처럼 생기지 않지만, 덕분에 성인으로서 개인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거실의 벽시계를 보니 새벽 1시 22분...

나는 TV를 틀어 놓은 채 거실 식탁 앞 의자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있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TV 불빛에 의지한 채,

치즈 육포를 하나씩 집어 질겅질겅 씹어 삼킨다.

틀어놓은 영화 채널에서는 '레옹'의 후반부가 상영되고 있다.

마틸다가 레옹에게 전해 받은 화분을 학교 뒤뜰에 옮겨 심는 장면이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 흘러나오는 스팅(Sting)의 Shape of My Heart 음악과 검은색 화면의 엔딩 크레디트.


'뭐냐... 이거 논란 많은 영화인데 마지막 장면은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울컥하지...'


나는 채널을 돌리지 않고 음악을 충분히 들으며 여운을 즐긴다.

이후에 화면에 치약, 맥주, 보험... 몇 개의 짧은 광고가 지나간다.

그 틈에 내 머릿속에는 Shape of My Heart의 선율이 계속 재생되고, "정말 사랑한다면 공원에 심어 뿌리를 내리도록 해요."라고 말한 마틸다의 얼굴이 잔상처럼 맴돈다.

이어서 나오는 영화는 '블랙스완'이다.

오늘은 이 방송사 테마가 나탈리 포트만인가?


나는 조금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이내 빈 맥주 캔을 한 손으로 구기며 걸음을 옮긴다.

가스레인지 뒤에 있는 삼단짜리 재활용 분리수거함 맨 위의 타포린백에 맥주 캔을 버린다.

그 옆에 페달을 밟으면 뚜껑이 열리는 쓰레기통에는 육포 봉지를 버리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니나가 일인이역을 맡게 된 장면이 나오고 있다.


그때 불현듯 내 머릿속에 익숙한 몸짓이 떠오른다.

리온예술고등학교 무용실.

늦은 오후.

햇빛이 바닥에 물결처럼 깔리던 그 공간.

집으로 가려는 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던 건 그 아이의 독무였다.

힘 있는 손끝과 곧게 뻗은 팔,

유려하게 도는 턴,

사뿐히 움직이는 발끝까지...

그리고 눈.

그 아이는 눈이 참 맑았다.

불순물 없는 보석처럼, 의도 없이 투명하게 빛나던 눈망울.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에 있던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돌아온다.

전원을 켜자, 바탕화면의 여러 파일 가운데 구석에 보이는 파일 하나.

2013-10-26 무용청강.

나는 TV를 끄고 숨을 죽인 채 파일을 더블클릭한다.

묘하게 설레는 그 눈을 다시 내 눈에 담고 싶어서 괜히 재생시켜 본다.

쑥덕이는 주변의 소음과 함께 들리는 클래식 음악, 카랑카랑한 현대무용 선생님의 음성,

그리고 많은 사람들 속에 선율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그 아이.

무용에 맞춰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유려한 턴에 땀방울이 흩날린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따라가는 그의 움직임은, 화면 속에서조차 살아 있다.

턴을 마치고 정면에서 멈춰 서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빛나는 눈빛.

진지하게 다문 입매가 이내 벌어지며, 해사한 웃음에 눈꼬리가 휘어진다.


"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 아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정신을 차려보니 영상은 끝나 있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 내가 왜 이걸 보고 있는 거지?'


괜히 얼굴이 일그러지고, 불청객을 마주한 사람 마냥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가슴이 올라오게 깊게 들이 마신 숨이, 다문 입 때문에 한숨 대신 코로 비집고 새어 나온다.

노트북 화면이 꺼지자 비치는 굳은 내 얼굴이 우습다.

나는 노트북을 덮은 뒤,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든다.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고, 담배를 입에 문다.

담뱃대를 이로 지그시 누르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터진다.

갑자기 머릿속에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진아, 너는 이 담배 진짜 잘 어울린다니까? 한 번만 펴봐."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서

학교 옥상에서 말보로 골드를 컥컥 대며 처음 피워봤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담배를 직접 사봤다.

그때 내가 고른 건 필라멘트 하이브리드 1mg이었다.

얇고 가벼운 담배와 흰색 패키지가 친구들 때문에 익숙했고,

멘솔 타입 신제품이라 시원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입으로 가져와 물고 담배 불을 붙인다.

한 모금 들이마시고 천천히 '후—' 하고 내뱉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가볍게 걸쳐 있는 얇은 담배에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열린 베란다 창문 밖으로 가볍게 담뱃재를 톡톡 털어낸다.

퍼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여름의 냄새가 희미하게 난다.

나는 눈을 감고 귀뚜라미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본다.

바람과 함께 얼굴에 느껴지는 습기, 여름의 젖은 흙과 풀 냄새,

그리고... 떠오르는 엄마의 가느다란 손목과 하얀 얼굴.


열두 살 즈음이었나...

여름 방학 중에 무료하게 뒹굴거리고 있던 아침,

엄마는 나를 흔들어 깨웠고,

가는 손목으로 소고기와 미역이 잔뜩 들어간 미역국을 한 그릇 떠 주었다.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밥을 먹고 있는데,

엄마는 나에게 뜬금없이 "오늘 공연을 보러 가자"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예술의 전당이라는 곳에 처음 가봤다.

건물은 크고 깨끗했으며, 여기저기에 전시와 공연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공연장은 어둡고 웅장했다.

무대의 양 옆에는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일층의 중간에서 조금 더 뒤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관람한 공연은 '백조의 호수'였다.

공연은 시작되었고, 무대 위에서 발레리나들이 춤추고 움직이는 동안

엄마는 말없이 내내 조용하게 관람했다.

나는 엄마를 흘끔흘끔 쳐다보느라 공연이 무슨 내용인지 집중을 잘 못했지만,

발레리나들의 몸짓이 사뿐사뿐해서,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와인색 커튼이 내려오고 난 후에는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무대를 바라봤던 엄마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리고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때로는 말보다 몸짓이 더 진짜 같아..."


무슨 뜻인지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 말은 왠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엄마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간 그날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날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여름 끝자락에 나를 임신했던 것을 알았고

백조를 마지막으로 연기한 무대를 끝으로 발레를 포기했다.

이 사실도 술 취한 아버지 입에서 한탄처럼 흘러나온 내용이기에...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다.


사실 엄마는 평소에 몸에 힘이 없었고 눈빛도 모호했다.

그런데 그날 나를 데리고 공연장을 향하는 엄마는 조금 달랐다.

왠지 신이 나 보였고 나를 잡은 손에는 힘이 있었다.

공연장에서는 왠지 말이 없었지만...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의뭉스러운 성격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는 그동안 발레에 대해 놓지 못했던 마음을, 혼자서 조용하게 장례식을 치렀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떠났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해 여름에 홀연히 사라졌다.


"진아, 미안해. 엄마 이해해 줄 수 있지?"


그 말만 나에게 남기고...

사실 아직도 그 말은 나에게 숙제처럼 남아 있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걸까?'


말보다 몸짓이 진짜 같다는 엄마의 말도,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마지막 부탁도,

모두 다 흩어져 버리고 나는 그저 홀로 남았다.

하지만, 나도 조금 있으면 공기처럼 흩어질 수 있을지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핸드폰으로 메일함을 열어본다.

확인하지 않은 스팸 메일 외에 별 다른 소식은 없다.


며칠 전에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가 프로그램에 지원서를 냈다.

설치미술 분야는 블루오션이라 나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지원 대상으로 선정될 시 받는 혜택을 다시 읽어본다.

해외 레지던시 파견, 교류 전시, 창작 지원금...


나도 정말 떠날 수 있을까?

후암동의 한자 의미가 '바위 뒤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나도 내 마음에 오래 눌러앉은 이 돌덩이 같은 마음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까...




※《경계에 선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연재됩니다.

혹시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는 분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작은 위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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