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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Apr 04. 2021

퇴직 후 이모저모 - 10

불안 장애 - 일체유심조

조금의 빛이라도 들어와 잠을 방해할까 봐 쳐놓았던 암막 커튼을 열었다.

동쪽으로 거실이 난 아파트 2층이라 아파트 정원이 바로 눈앞에 있다.

창문을 열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의 나무 끝에 노란빛이 보인다.

산수유 꽃이 피고 있다.

그런 다음 매화나무에도 꽃이 피고, 목련에도 꽃망울이 피어나고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봄은 다시 시작됐다.

날씨가, 계절이, 세상이 봄이다.

사방이 온통 화사한 그 세상에 난 포함되지 않나 보다.

눈으로만 보는 봄일 뿐, 가슴으로 느끼는 계절은 아직 겨울이다.

세상은 나 몰라라 흘러가고 난 혼자 저만치 툭 떨어져 있으니 여전히 좋은 걸 좋다고, 예쁜 걸 예쁘다고 느끼지 못하게 됐다.


그 언젠가부터 생긴 막연한 불안감은 퇴직 이후 점점 심해져 이젠 불안 장애라고 규정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지경이 됐다.

그런 불안 장애 증상은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시작이다.

그건 의식이 있는 동안은 항상 불안 장애에 시달린다는 말이다.

딱히 그럴 일이 없는데도 가슴은 답답하고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가득하다.

그리 많이 남지 않아서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하루를 그렇게 시작한다... 가 아니라 시작된다.

사실 딱히 그럴 일이 없는 건 아니다.

경제 상황에 대한 걱정이 그거다.

어찌 보면 나 하나 먹고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서 오는 걱정이다.

그 걱정이 타당성이 있는지, 아니면 불안 장애라는 놈에 의한 습관성 걱정인지 들여다보자.

아내 명의로 된 달랑 한 채뿐인 집에서 살고 있다.

비록 은행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지만 다행히 은행에서는 방이라도 한 칸 내어달라고 하지 않으니 오롯이 우리 가족만 살고 있다.

우리 가족만 살게 해주는 대가로 제법 많은 돈을 은행에 다달이 지불해야 한다.

아내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 그만 두기엔 아깝고 다니자니 부족한 급여를 받는 중이다.

큰 아이는 곧 결혼한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며 한 푼의 지원도 필요 없다지만 그게 오히려 더 짠하다.

터울이 크게 지는 작은 아이는 과외를 하며 용돈을 한 푼도 받아가지 않는 새내기 대학생이다.

나름 재원인 편이라 대학원도 보내고 유학도 보내고 싶다.

나?

뭐라도 돈벌이하겠다며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은 벌이가 없어서 곶감 빼먹듯 증권계좌에서 몇 주씩 빼내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그러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아내와 노후를 보낼 텃밭 있는 주택 마련을 꿈꾸고 있다.

이리 말하고 보니 내가 힘들어하는 불안 장애는 실체를 모르는 막연한 것이 아니다.

충분히 타당성이 있고 실체가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있는 불안감이었으니 이건 불안 장애가 아니다.

명확한 이유가 있는 현실적 걱정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봐야 한다.

장애든 문제든 간에 그게 해소되기 전까진 불안감은 없어질 수가 없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남은 시간 또한 줄어드니 마음이 급해져서 불안감은 더 커진다.


이때 문득 드는 생각...

경제 상황만이 날 불안장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맞는 걸까?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당장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닌데.

혹시 그리 될까 봐 미리 걱정하는 건가?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면 불안 장애는 사라질까?

그러나 그리 된다면 생활수준의 기대치가 다시 높아지지 않을까?

... 자신 없다.

그땐 경제 상황이 계속 유지되지 않을까 봐 걱정일 테고, 아니면 다른 이슈(예를 들면 건강이나 자녀 문제 등)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겠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 온 욕구의 제물로 이카루스의 끝없는 고통이 반복되는 듯하다.


힘들다...

그만 힘들고 이젠 정상(正常)으로 돌아가고 싶다.


막상 이리 말하니 대체 정상은 무엇이고 돌아간다는 게 맞는지, 거긴 힘이 안 드는 곳인지 모르겠다.

정상이 무엇이든, 돌아가는 게 맞든 틀리든 힘든 건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상황이 개선되든 개선하든, 의도적으로나 착각으로 생각이 바뀌든 말이다.

세월은 겁나 빨리 흘러 남은 시간은 동짓달 해처럼 짧고, 내 참을성은 그보다 더 짧으니 기다리다 이미 세상 굿바이다.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비단옷에 꽃을 올리는 격이지만 지금껏 해 온 게 있는데 갑자기 개미처럼 성실해지고, 기막힌 사업거리가 떠오르고, 도와주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로 주변이 북적일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아직은 때가 아니니 그러진 말자.

그러니 그걸 기다리지는 말자.

상황을 바꾸는 건 내 능력 밖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보이지 않는 구석 한편에 치워두자.


우선 생각을 바꿔 볼까?

그게 쉬워서가 아니라 사실 해볼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 다른 도리가 없다.

비록 여태껏 수천, 수만 번 시도했고 그 시도의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긴 하지만...

게다가 어렵기로 치면 그게 세상 제일 어렵다.

그래도 딱히 돈이 안 들고 조증이 발현되어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으니 거기에 올라타면 가능할 듯도 하다.

왜 가끔 이런 날이 있지 않은가.

방안 깊숙이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문득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힘이 솟는 듯한...

가족과 식탁에서 맥주 한 잔 기울이다 누군가의 말에 웃음이 빵 터지면 가슴 가득 행복감이 차오르고 그래서 울컥하며 힘이 솟고 희망이 생기는...

어쩌다 적은 수입이라도 생기면 한줄기 희망의 빛이 느껴지는 serendipity의 경험...

이리 말하니 꽤나 구질해 보인다만 굳이 그리 생각지 말자.

여유 있는 사람들 삶과 의식이 어떤 형태인지 모르지만 희로애락의 모습이야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예전에 모 재벌의 금지옥엽 셋째 딸이 자살한 기사가 났을 때 이렇게 이야기하며 스스로 위로하지 않았던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가 보다."


그래, 이렇게 상황에 대한 인식의 메커니즘을 바꿔보자.

그러려니 내버려 뒀던 input과 output 사이의 회로를 들여다보자.

복잡한 회로 일부를 조금만 바꾸면 그다음은 전혀 다른 루트로 흘러가서 새로운 output이 나오지 않을까.

그 회로를 바꾸려면 우선 급한 건 이거다.

정신에 대한 통제권을 내가 온전히 가져야 한다.

정신이란 게 온전히 내 것이 아니긴 하지만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모든 과정이 내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으니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정신을 내가 통제하는 거다.

어찌하면 그것이 가능할까.

어떤 노력을 해야 하고 어느 수준의 통제를 목표로 잡아야 하고 어떤 실행 지침이 필요할까.

(설마 input의 종류나 경로의 복잡다단은 아무 의미 없이 깔때기처럼 무엇을 넣고 어떤 경로를 타더라도 결국 output은 하나의 출구 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ㅎㅎㅎ)


이것부터 할까?

'sound mind  in sound body'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마음은 육체를, 육체는 마음을 때론 공격하고 때론 고쳐준다.

불안장애로 힘든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몸부터 개선하는 건 어떨까.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 무에 그리 아낄쏘냐라며 막 다뤘고 스트레스 핑계로 막 먹어 재꼈다.

뭘 해도 지치지 않을 이팔청춘 때의 호기는 사라지고, 이젠 바닥의 물기만 봐도 미끄러질까 봐 발 내딛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이제야 건강이 중요해졌다.

건강할 때 건강의 중요성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잃어야 소중함을 아는 게 사람이지.

걷기든 스트레칭이든 건강 비법은 사람 수만큼 많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들은 걸 따라 해 본다.

눈 떠서 일어나기 전에 침대에 누운 채 관자놀이 두드리기로 두뇌 워밍업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목과 팔다리를 스트레칭해주고...

귀차니즘을 간신히 떨쳐내고 고운 연두색의 새순이 올라오는 버드나무가 늘어선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렇게 움직이며 기분이 조금 좋아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힘들다고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승에서는 이렇게 힘든 게 정상이라고.

그러니 힘들지 않은 저승을 바라지 말고 지 힘들지만 얼마 남지 않은 이승을 즐기자고.


일어날지, 아닐지 모를 이슈들을 미리 앞당겨 앞에 쌓아놓고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눈 앞에 닥치는 대로 하나씩 풀어 나가기로 하자.

생길지도 모르니까 미리 대비하자고 앞당기지 말자.

그건 능력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나 같은 평균 이하는 그냥 앞에 오면 그때 만나주자.

다만 그게 힘들다고 회피하지는 말자.

회피하면 그 시간에 또 뭘 할 것인가?

'이 일을 어쩌나' 하며 걱정밖에 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뭐라도 하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뒤로 미뤄 둔 것이 지금 내 앞에 쌓여 있는 거다.

이젠 뒤로 미룰 시간적 공간이 없다.

눈 떠보니 60년이 지났다.


불안은 누가 내 머릿속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 안에서 만들어진 거다.

원하지 않은 어떤 것을 피하려다 보니,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원하다 보니 생겨난 감정이다.

불안도 평안도 일체유심조다.

불안도 내가 아닌 내가 만들었으니 평안도 내가 아닌 내가 만들어 보자.


어제 내린 봄비에 벚꽃 잎이 많이 떨어졌다.

바닥이 달마시안처럼 온통 점박이다.

만개할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제대로 피기도 전에 저리 되니 안타깝다.

꽃잎 한 점 떨어져도 봄빛이 줄어든다 했는데 저리도 바닥에 다 떨어졌으니 봄은 또 무엇으로 빛을 내나...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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