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라니요.ㅠㅠ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이었으면 그 마지막 단어를 검색했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어쩌다 한 번 개똥밭에 빠진 사람에게나 소용 있을 뿐이다.
늘 개똥밭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라면 어찌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도 힘들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저울에 올려 비교하지 못해서 내 고통이 더 크다.
항암 치료받는 타인의 고통보다 손에 가시 박힌 내 고통이 더 생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돌의 무게는 가족의 소중함과 비례한다.
거기까지 갈 일도 없고 가기도 싫고 가서도 안 된다.
난 남편이고 아빠고 가장이다.
하지만, 그 단어를 검색한 사람들은 혈혈단신이라서는 아니겠지.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마땅한 답이 없다.
돈이 문제라 한들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몰려와도 해결할 수는 없겠지.
물론 돈이 유일한 문제가 아니니 모든 심리학자와 정신과 상담의가 와도 사람 수만큼 제각각인 케이스를 맞춤 해결하기도 어렵고, 설령 해결한다 해도 인간사가 워낙 요지경이라 새로운 이슈들은 초 단위로 나타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어쭙잖지만 한 마디라도 하고 싶다.
의외의 곳에 희망의 불씨가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버텨 보자고.
세상에 화도 내고 욕도 하면서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숨 크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한 번 더 보자고.
이내 다시 절망에 빠지더라도 어딘가 있을 희망 한 번 찾아보자고...
이도 저도 다 귀찮고 싫으면...
제일 미운 그놈을 찾아가서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자.
이왕 갈 거라면 그렇게라도 풀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갈 건데 배려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 따위는 잘난 놈들 버글대는 더러운 이승에 놔두자.
그리고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이 글 한 번 읽어보자.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