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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Oct 02. 2021

퇴직 후 이모저모 - 13

삶의 의미

모든 식구들과 함께 복닥거리며 자는 걸 좋아하는 작은 아이 덕에 거실은 가끔 침실 대용이 된다.

늘 그렇듯 일찍 눈이 떠진 나는 아직 자고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며 혼자 미소 짓는다.

아이는 꿈을 꾸는지 표정이 변하기도 하고 몸도 이리저리 뒤척인다.

조금 있으려니 자기를 바라보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설핏 눈을 뜬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발을 쭉 내민다.

나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아이가 내민 발을 조몰락거리기 시작한다.

스무 살 새내기 대학생이지만 한 손에 다 잡히는 발은 아직 애기 발처럼 말랑거리고 보드랍다.

발을 내어 준 아이나 그 발을 받아 주무르기 시작한 나나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지 엄마 발을 주물러 주는 걸 보고 '나도 해줘'라며 시작된 거라 그냥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무언가 다른 느낌이다.

발과 손의 밀착으로 사랑스럽다는 것과 아이가 편안하게 잠을 깬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는 거야 늘 가진 느낌이지만 오늘은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다인가?

이게 내 삶의 전부인가?

내 삶의 실체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 살아오고 있는가?

살아오는 건지, 살아가는 건지?

과거를 돌아볼 때는 살아오는 거고, 앞을 보면 살아가는 걸까?

어느 것이든 간에 무엇 때문에 그리 쉽지 않은 인생을 꾸려 오고 있는 걸까?

때론 버거워서 놓고 싶기도 하다가, 때론 가슴 뿌듯해지는 벅찬 희열을 느끼기도 하는 삶.

아이의 발을 주무르다가 보드랍고 말랑한 발이 사랑스러워 발에 입맞춤하는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

이게 내 삶이냐고 물음을 던지는 건 지금 아이의 발에서만 뿌듯함을 느껴서인가?

더 커다란, 더 폼나는 것으로 희열을 느끼고 싶어서인가?

이런 삶으로 끝날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나는 걸까?


아내가 오늘 아침은 셀프 김밥으로 하잔다.

아이들이 늦게까지 자는 동안 아침 준비를 한다.

김밥 재료로 엊저녁에 먹다 남긴 족발에 양념을 더해 가늘게 썰어 놓는다.

김치를 볶아 가늘게 찢고, 치즈며 참치 등 재료를 준비하는 중에 아내는 새로 밥을 해서 간을 하고 상을 차린다.

아내와 함께 준비하는 식탁은 낯설지 않은, 어찌 보면 루틴에 가까운 풍경이다.

이렇게 준비한 아침을 먹으며 여지없이 '엄지 척' 해주는 아이들을 보면 때론 눈물이 날 정도로 뿌듯하고 행복하다. 

아침상을 물리고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커피를 갈고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린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곡인지 모를 클래식 음악과 예가체프 커피의 향긋함이 주말 아침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때론 "이게 내 삶의 전부일까?"라는 생각이 들며 내 삶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혹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디냐고...

그거면 차고 넘치지 않냐고...

그래, 어쩌면 이걸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 마땅치 않아서 항상 그리 노심초사한 건지도 모르지.

거기에 지쳐서(행동하느라 지친 게 아니라 걱정만 하느라) 삶의 가치가 어쩌고 저쩌고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한 게 분명하다.

그리고 보면 이유가 무엇이든 시기와 질투를 가진 욕심쟁이에게 희열은 반드시 걱정을 동반하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를 만족시키는 삶은 어떤 수준이고 어떤 모습인가.

늘 나를 괴롭히는 불안감의 원초적 출발점인 욕구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어딘지 모르는 거기에 도달하면 늘 내 머릿속 어딘가에 찐득하니 달라붙어 있던 끔찍한 욕구는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진정적 평화가 찾아 오려나.

어딘지 특정하지도 못하는 그곳에 가고자 하는 의지가 과연 내게 있을까?

처음부터 갈 생각도 없이 가지 못하는 무지개 있는 곳이라 단정지은 건 아닌가.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노력이 자신 없어서 도저히 닿지 못하는 곳에 올려놓고 애꿎게 시기와 질투로 포장해 놓은 건 아닌가?

아니, 진정한 평화가 있는 그곳은 진짜 좋은 곳일까?



얼마 있으면 환갑이다.

ㅋㅋㅋ

이런, 젠장...

내가 환갑이란다. 그냥 웃자.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놓을 정도로 유능하지도 않으니 늙고 때 되면 사라지는 게 진정 세상과 인류를 위한 자리비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역할이 없어지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있다.

나이 먹으니 아픈 곳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몸도 그렇고, 마음 또한 그러하다.

젊을 때도 그렇긴 했다. 

늘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건강 염려증일 수도 있고 심약하거나 예민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 근래의 통증은 그냥 하직했으면 할 정도일 때가 있다.

몸이 그러니 마음까지 까부라지게 된다.

마음이란 게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몸과 따로 노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니 당연하다.

점점 몸도 마음도 아프고, 그래서 이모저모 힘들어진다. 

그러다 문득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다. 나이 먹으면서 아픈 게 천만다행이다.

나이를 먹어가도 아픈 곳 하나 없이, 청춘들처럼 몸이 쌩쌩했으면 어찌 되겠는가.

몸은 펄펄 나는데 나이 먹는다는 것으로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억울해서 어찌 죽겠는가.

삶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이 고통으로 조금이나마 옅어지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의도적인지 우연히 그리 된 건지 모르는 신의 안배가 놀랍다.

그걸 알아챈 걸 보면 나도 진짜 늙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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