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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May 08. 2021

퇴직 후 이모저모 - 11

자살이라니요.ㅠㅠ

깜짝 놀랐다.

브런치에 올린 글에 들어오는 분들의 유입 경로를 보다가 '퇴직 후 자살'이라는 검색어가 보여서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이었으면 그 마지막 단어를 검색했을까...

누군지 궁금했다.

"저도 그 마음 압니다. 얼마나 막막한지 공감합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그런 건방도 필요 없다.

그저 꼭 껴안고 같이 펑펑 울자.

이러니 저러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어쭙잖게 공감하니 마니, 힘내라 마라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혹자는 그러더라.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 보라."라고.

오죽 안타까우면 그리 말할까마는, 그런 선택은 또 오죽 힘들어서였을까 싶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 희망도, 의지도 탈탈 털어 다 소진한 사람에게 무슨 힘이 남아 있겠는가.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절망에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어쩌다 한 번 개똥밭에 빠진 사람에게나 소용 있을 뿐이다.

늘 개똥밭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라면 어찌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한 때 사람들 입에 회자된 불가역적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마지막 행위라는 게 문제다.

그래서... 

힘들면 그러라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 그러라고 결코 동의하기 어려운 이슈인 거다.


나도 다른 이들만큼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힘들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저울에 올려 비교하지 못해서 내 고통이 더 크다.

항암 치료받는 타인의 고통보다 손에 가시 박힌 내 고통이 더 생생하다.

힘든 상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사라질 기미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아직 버둥거릴 힘은 있다.

반년 전부터 새롭게 시작한 일이 나름 재미가 있다.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만들지 못해서 실망스럽고 답답할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어찌 늘 같은 상황이고 같은 기분이겠는가.

때론 실망스럽다가도 때론 희망의 빛이 보일 때가 있다.

늘 실망과 절망뿐이라면 나도 그 단어를 검색하기 전에 실행부터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행히(?) 내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손 잡고 집 앞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다 맥주 한 잔 하자는 아내가 있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깔깔대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아이들이 있다.

숫자 야구나 라이어 게임을 하며 즐거워하는 가족이 있다.


그렇지만...

힘들어도 가족이 있어서 버틴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족이 날 더 힘들게 한다.

사랑스러운 가족은 어깨에 올려진 돌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돌의 무게는 가족의 소중함과 비례한다.

조금이라도 더 편한 삶을 만들어 주고자, 그래서 그나마 작은 행복을 잃지 않으려 노심초사다.

문제는 이거다.

그런 당연한 욕심과 내 능력은 반비례한다는...

다른 이의 성취가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듯 시기와 질투는 잔뜩인 반면, 능력과 노력은 개뿔도 없으니 참 안타깝고 애달프다.

그래도 어쨌든 아직은 그 단어를 찾아보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거기까지 갈 일도 없고 가기도 싫고 가서도 안 된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고, 그들에게 배신감을 주긴 싫다.

난 남편이고 아빠고 가장이다.

하지만, 그 단어를 검색한 사람들은 혈혈단신이라서는 아니겠지.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마땅한 답이 없다.

돈이 문제라 한들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몰려와도 해결할 수는 없겠지.

물론 돈이 유일한 문제가 아니니 모든 심리학자와 정신과 상담의가 와도 사람 수만큼 제각각인 케이스를 맞춤 해결하기도 어렵고, 설령 해결한다 해도 인간사가 워낙 요지경이라 새로운 이슈들은 초 단위로 나타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어쭙잖지만 한 마디라도 하고 싶다.

의외의 곳에 희망의 불씨가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버텨 보자고.

세상에 화도 내고 욕도 하면서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숨 크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한 번 더 보자고.

이내 다시 절망에 빠지더라도 어딘가 있을 희망 한 번 찾아보자고...


이도 저도 다 귀찮고 싫으면...

제일 미운 그놈을 찾아가서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자.

이왕 갈 거라면 그렇게라도 풀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갈 건데 배려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 따위는 잘난 놈들 버글대는 더러운 이승에 놔두자.


그리고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이 글 한 번 읽어보자.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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