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Feb 24. 2021

퇴직 후 이모저모 - 9

퇴직한 지 만 2년

이제 명예(?) 퇴직한 지 2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변한 것도 있고, 여전한 것도 있다.

변해봐야 얼마나 변했겠냐마는 굳이 따져 보자면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달복달하던 마음이 조금은 무뎌졌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고슴도치처럼 바깥으로 향해있던 삐죽한 가시들이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건 필시 어딘가로 날아가 꽂혔다는 거다.

제까짓 게 날아가 봐야 어디로 갔겠는가.

가까이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는 아내에게 제일 많이 박혔겠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와 박히는 가시를 하릴없이 참고 견딘, 견딜 수밖에 없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사실 '견딘다'는 것은 참 싫은 일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참아 내야 하는 것이니 아프기도 하고 서러운 것이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지 편하자고 쏘아대는 것이니 그저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한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그런데 이 놈의 가시가 빠지고 나서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활 쏘듯이 가시를 마구잡이로 날려 보내고 다 떨어졌나 했는데 다시 장착되려 한다.

가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고슴도치라는 게 문제다.

그러니 주변을 아프게 하는 건 나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슴도치로 나서 고슴도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는 또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는 이기적인 자기 연민으로, 말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대신 하자.

새로 나오는 가시는 덜 날아가게 붙들어 매고 끝을 말랑하게 만들어서 덜 아프게 하자. 

스트레스를 핑계로 이내 가시 끝을 날카롭게 벼리더라도 지금 마음으로는...


퇴직 후 2년 간 바뀐 건 어쩌면 그것밖에 없는지 모른다.

'내가 고슴도치였고, 가시를 맞은 사람이 아팠을 거, 그걸 바꾸고 싶은데 쉽지 않다는 거'를 알게 된 것?

인간이 다듬어져서가 아니라 꼬락서니가 이래서 어쩔 수 없이 건방끼가 줄어 겸손해졌다고나 할까.

자발적인 겸손이 아니라 아쉽긴 하다만 강제로라도 그리 된 게 어딘가, 다행인 게지.

기껏 찾고 위안 삼는 게 그 정도라니 꽤나 씁쓸하다.


퇴직 시 가장 망설이게 만든 경제적 이슈는 우려했던 바 그대로다.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팔딱거린 덕에 다행히 작년 한 해 3천 정도의 수입을 얻었다.

(그건 법인 컨설팅 영업과 정부가 마련한 3개월 남짓의 단기 일자리에서다)

근데 그게 운이 좋아서 얻은 수입이고, 월급이나 월세 같은 항구적인 수입이 아니니 다시 원점이다. 

올해는 아직 수입 제로다.ㅎㅎㅎ


그렇다고 씀씀이가 퇴직 전보다 개선됐냐면 그도 아니다.

퇴직 직후 처음에만 반짝 지출을 줄였는데 얼마 안가 도로아미타불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다시 지출을 원상회복(?)했고 '더 해빙'같이 유치한 '시크릿'류의 책에 기대 소비성 지출을 합리화하고 있는 중이다.(하긴 그렇게라도 위안 삼는 게 건강엔 도움되겠다)

수입이 없을 때는 주식에 들어 있는 약간의 돈을 곶감 빼먹듯 쓸 수밖에 없다.

근데 그게 화수분은 아니니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 걱정이다.

쓴 만큼 채워져야 하는데 수입이 없으니 언제 채울지 난망이다.

오를 때 팔고 내리면 사서 차액으로 다시 채우면 좋겠지만 늘 그렇듯 주가는 오르락내리락 반복 중이고 그마저도 타이밍을 모른다.

팔아야 할 시점엔 마냥 떨어질 때고, 오를 때는 더 오르겠지 하며 기다리다 때를 놓친다.

무당도 아니니 이를 어찌 알랴.

요행수에만 의존하는 게 미련스러워 공부 좀 하겠다고 사놓은 주식 관련 책만 서너 권인데 학창 시절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영어 책처럼 앞부분만 폈다 덮었다를 반복한다.

시월엔 큰 아이가 결혼한다. 

이를 어쩌나, 시름은 켜켜이 쌓여만 간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아주 쇼킹한 소식이 들려왔다.

퇴직하기 전 다녔던 직장이 매각됐단다.

놀라움은 컸지만 사실 영향받을 일이 아니고 가십 거리로 최적인지라 심심하던 차에 여기저기 입 털기에 바빴다.

그래도 매각 소식을 들으니 착잡했다.

고용과 복지는 승계한다지만 그게 그리 될지... 

남아 있는 후배들은 아무래도 불안하겠다.

노조에서 반대 투쟁한다지만 이미 떠난 버스라서...

막상 이리되니, 남아 있는 후배들은 2년 전 명퇴를 선택한 직원들이 부럽다고 한다.

글쎄... 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할까.

머리카락으로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손오공이 아닌 바에야 동시에 두 길을 가지 못하니 그 어느 것이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는 거다.

잘한 선택은 없고 잘된 결과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나도, 너도 본능적으로 변화가 두렵다.

현재를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 잔류를 선택하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을 내지 않았는가.

현재를 유지하는 것은 정체가 아닌 퇴보라고 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든 현재에 안주하든 결과가 보장된 것은 없다.

선택 이후의 결과는 오로지 내 몫이고 책임이다.

선택하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는 건 지금의 선택에 매진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하긴, 그런 후회를 하지 않는 경우가 또 얼마나 되겠는가.

100% 후회할 거다.

어느 길이든 힘에 부칠 때마다 남겨 둔 다른 꽃길(?)을 돌아보며 이내 후회하겠지.

그러니 '고달픈 영웅보다 안전한 겁쟁이가 낫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아내처럼 현재 상황에 몰입하는 게 최선이다.

아니면 미리 준비를 하던가.

2년 전 퇴직하는 우리를 보며 남은 후배들은 나름대로 다짐을 했을 거다.

내게도 저런 일이 닥칠 테니까 지금부터 뭔가 준비해야지...라고.

근데 다들 그렇게 다짐대로 살면 인간미가 없겠지?


퇴직 3년 차에 접어든 올해, 다짐 하나...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일 열심히 하자는 다짐.

성과 여부를 떠나서 일도 배우고, 사람도 많이 만나면서 1~2년 버티다 보면 무언가 결판이 나겠지.

'존버'가 승리한다잖아...ㅎ


글 쓰다가 잠시 한 눈을 팔던 중 눈에 들어온 모집 광고 하나.

직장 경력 20년 이상된 50대를 찾는단다.

손은 이미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이전 08화 퇴직 후 이모저모 -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