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서 현재까지
'코로나'
이제는 종식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가는 것 같다.
2020년 20이란 숫자가 반복되던 해.
그해의 시작은 뜻하지 않게 ‘코로나’라는 복병과 시작되었고 결국 공생했다.
코로나의 낯선 기운으로 우리는 허둥지둥, 우왕좌왕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의 정확한 대응 정책으로 인해 지금의 여기까지 온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해 배, 비행기의 발길이 묶이고 언제 열릴지 몰랐던 폐쇄 조치.
해외에서 입국 시마다 PCR 검사는 기본, 출장으로 출국 시에도 PCR 서류는 의무였다.
처음 코로나 발병 당시,
어느 곳이 근원지인지 모를 때 의료인이 가장 먼저 경계대상 1호였다는 거 기억할까?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기억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의료인이어서 서글펐다.
코로나 환자를 돌보는 바람에 코호트 격리를 당한 엄마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이 걱정이 되는데, 오히려 아이의 어린이집은 이 엄마가 코로나가 아니었지만 등원 중지를 요청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정말 속상했다.
최전방에서 뛰는 의료진들에 대한 격려보다는 오히려 가족으로 전파 감염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니.
특히 의료진이 부족할 때 자원에서 간호를 시행했던 의료진들 정말 지금도 존경스럽다.
방호복 자체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땀이 줄줄 흘릴 정도로 벗기도 입기도 힘든 옷이었다. 그런 옷을 입고 하루 종일 검사하는 사람, 근무시간 내내 입고 식사도 먹여야 되고 의료 행위를 했던 사람.
쉽지 안 않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끔은 위급상황 때는 방호복의 의미가 무색할 때도 있다.
코로나 환자일지언정 심장 마시지가 우선이고 환자를 살려야 된다는 목표 하나는 변함이 없기에 일반 환자와 같이 마사지도 기관 내 삽관도 시행해야 된다는 사실.
그렇게 코로나로 인해 살얼음 판을 걸어야 할 때 정말 힘들었던 건.
의료진이 코로나에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반대로 대화가 안 되는 분들과의 언쟁은 정말 너무 지치게 했다.
그분들은 아실까?
의료진도 사람입니다(폭언하지 마세요)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요양병원 면회 금지, 정부 자체에서 보호자 1인 제외 면회 제외 및 PCR 결과지가 없으면 병원에 진입하지 못했던 시절.
코로나 예방접종 상관없이 검사결과지가 있어야 진입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미리 사전 공지를 다했고 안내를 위해 방송도 정부 지침사항을 미리 그렇게 붙이고 설명했건만.
명절인데 왜 못 들어가게 하냐고 언성을 높였던 분들.
보호자가 멀리서 왔는데 잠깐만 보고 가는 것도 이야기하고 들어가야 되냐고 했던 분들.
이런 분들도 힘들었지만, 정말 안 되는 건 아는 분들이 더 무서웠다.
임종 직전이라는 이유로 종교인 부부는 끝까지 검사했다고 우기면서 응급환자 보는 순간에 들어와서 10분 정도 기도를 하고 갔던 일이 발생했다.
끝까지 본인들이 뭘 잘못했으며 부모 자식도 없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셨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너무 황당하고 이해불가였다.
현재는 코로나 환자가 같은 병동에서 격리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병실에서 코로나 양성이 나오거나 미결정 상태(재검사를 요하는 경우)만 되어도 민원이 빗발치던 상황이었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왜 저 사람은 안 쓰냐? 간호사가 가서 말해야 되는 거 아니며, 간호사들 일 똑바로 해라. 근무태만으로 신고해도 되죠?”
라는 식의 협박과 나는 못하겠다는 식의 언행들.
“아니, 검사를 다시 해서 음성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건데. 그럼 우리는 어찌 되냐고?”
“그리고 왜 내가 돈 내고 검사해야 되냐? 보호자는 봉이냐? 우리도 무료로 해줘야지. 나 못 낸다. 그리고 밥도 공짜, 검사비도 공짜 아니냐?”
이런 식으로 아직 코로나로 결정도 안됐는데, 애매한 환자만 있어도 환자, 보호자들에게 업무태만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마스크 관리에서부터 보호자, 간병인 관리까지 해야 됐던 시절이었는데.
환자와 1인 보호자들은 코로나 감염이 될까 봐 불만을 표출하는데,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의식만 가지고 무조건 진입하려고 하면.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됐을까?
종교인이 가족이 아닌 이상 진입이 불가했던 시절에 정말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결국에는 1층 출입 관리하는 직원들과 감염실, 결국 행정부까지 보고하여 결국에는 행정부와 감염관리 선생님이 민원 제기를 역으로 하시는 걸로 해결이 됐다.
욕을 얻어먹어서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한 군데가 뚫리면 출입구가 하나인 병원은 전체 폐쇄였다. 그것만은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출입자들 명단에 의료진은 매일 출퇴근 시간에 발열 체크까지 직접 다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의외의 복병들이 나타나면 기운이 빠진다.
힘들게 일하면서 보호자에게 불친절하다는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마스크는 필수, PCR 검사 결과 확인 등등.
그때의 면회 절차가 까다롭게 한다는 소리는 필수인데도 우리는 묵묵히 그 시기를 버텼다.
지금은 추억의 한자리로 들어가겠지만,
그때의 서운함, 억울함, 힘듦.
그 시절에 힘든 점을 어디 나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게 자체적인 통금시간이 지정돼있었다.
(저녁 9시 이후 모든 영업점 문은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