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코로나 유지 중입니다.
실내에서는 마스크 유지, 실외에서는 마스크 해제가 결정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지금.
난 아직 숨이 차지 않는 한 실외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닌다.
저희 딸은 행여나 아프면 수련회를 못 가니 무조건 착용한다.
이럴 때 보면 초등학생, 유치원생이 가장 마스크를 잘 끼고 다니는 게 맞다.
가르쳐 주는 대로 시행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내가 하고 딸이 해서 마스크를 착용해달라는 건 아니다.
병원 어느 곳이든 실내에서는 마스크 착용해주세요!
라고 적혀 있다.
모든 침대 발밑에 공지사항을 알려주듯이 걸려있습니다.
아직 실내에서는 마스크 착용 중입니다. 식사시간 제외하고 마스크 착용해주세요!
몇 번을 외친 듯하다.
이 말을 안 하는 날이 올까?
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수백 번.
그런 날이 다가오길 바란다.
그러나 아직 실내는 아니다.
오늘도, 제발 마스크 착용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을 수십 번 했으나.
"그냥 급하게 나오느라 안 했다."
"아니 잠깐은 벗어도 되는 거 아니냐?"
정말 마스크 미 착용 시 벌금이 부과된다는 안내문이 있어도 착용 안 하시다 마스크 착용해주세요 하고 나면.
“나, 마스크 없어. 하나 주던지?”
여기는 관공서도 아니고 병원인데 버젓이 주라고 한다.
정말로 보호자가 연락 두절돼서 마스크를 일부러 주는 것은 관대한데,
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밉상처럼 보이는 걸까?
젊은 환자이면서 보름 넘게 입원한 환자인데,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냥 나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마스크는 착용 안 하고 나온다.
정말 수십 번, 수백 번 들으셨을 건데 말이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 어떤 보호자는 마스크를 끼고 계시다 우리에게 물어보신다고 일부러 내리신다.
KF도 아닌 덴탈 마스크를.
예를 들면 끝이 없겠지만,
아이가 입원해서 있는 임신한 보호자조차도,
코로나로 입원환자가 지속되는데도 마스크가 없다고 당당히 말씀하신다.
아이의 엄마가 더 조심해 줄 거라고 생각한 내가 오산이었나 보다.
오히려, 나이 드신 어르신은 숨이 차도 쓰고 다니시는 걸 보면 안타까워질 때가 많아진다.
마스크로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마스크로 인한 추억을 회상하게 됩니다.
처음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대화를 하던 중에 의사의 처방을 받다가 구두로 하게 되는 경우 다시 물어봐야 되는 경우 및 전화로 통화하던 중에도 발음이 애매한 걸로 인해 재차 확인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직접 처방 내는 게 익숙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의료진 간의 의사소통이 처음에 가장 어려웠다면.
외래에서 의사와 환자와의 대화도 쉽지 않았을 거다.
환자분들이 말씀하시는 걸 잘못 들어서 다시 물어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환자와 간호사의 대화 속에서도 다시 또 물어본다고 귀찮아하신 적도 있다.
물? 옷? 이런 식으로 헷갈렸던 적들로 인해서.
가장 난감했던 게.
청력이 저하되시는 분들에게는 의사소통이 조금 더 힘들어진 게 맞았다.
그래서 가끔은 종이에 의사를 표현했던 적도 있다.
서로 그게 편한 게 맞기에.
입모양으로 의사 표현을 하기에는 마스크란 장애물이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이제는 마스크를 쓰고도 알아듣게 된다는 사실에 가끔은 웃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
그렇게 익숙한 마스크가 내년 3월쯤에는 실내에서도 벗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 날이 오면 어떻게 될까?
좋을까?
아니면 어색할까?
마스크를 쓰기 전부터 알았던 사람들과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마스크를 쓰고 만난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은 식사할 때 어색할 때가 있다.
‘아, 저런 얼굴이었구나!’라는 생각도 했던 적이 있으니.
더울 때를 생각하면 마스크 착용이 해제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처음에 마스크를 썼을 때의 불편함이 이제는 익숙함이 됐듯이.
마스크를 벗고 어색하다는 나의 모습이 어느 순간에는 행복함으로 적응되지 않을까라는 추측도 해본다.
내일도 나는 “제발 마스크 착용해 주세요!”
라고 외치겠지만, 그래도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는 희망에 조금은 미소가 지어진다.
2022. 10월 난 마스크로 인해 이렇게 생각했으며 기록했다는 걸로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