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정주행 중입니다-친구가 떠나면서 나에게 전해준 선물
내게 5월이란 달은.
오래전 실습하다 주저앉으면서 내가 간호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달.
우리 큰 공주가 태어났던 달.
그리고 몇 년 전 나의 오랜 벗이 하늘나라로 여행을 갔던 달.
이다.
“홍아, 나 가슴에 뭐가 잡혀?”했던 그 친구가
첫 진료를 보고 괜찮다고 6개월 뒤에 진료 보라고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친구가 그걸 잊어버렸다. 그 뒤의 상황은.
결국 진료받기 전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마음에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결론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나였다.
“수술하면 괜찮겠지?”
했던 그녀는 결국 서울 쪽으로 병원을 택했고 항암치료를 시작해서 사이즈를 줄인 뒤 수술하기로 결정됐다.
이럴 때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힘내, 괜찮을 거야!”라는 말밖에...
그런데 그맘때 유난히 내 또래의 유방암 환자들이 자주 보였다.
그런 환자들을 보면 왜 난 더 측은해지는 걸까?
내 친구는 그나마 아이가 없어서 더 나은 건가?라는 생각을 들게.
입원하는 환자들에게는 왜 조그마한 아이들이 있었다.
엄마, 괜찮아?라고 묻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그 아이의 엄마에게. 나는 어떤 걸 해줘야 할까?
내가 그런 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좀 더 관심과 배려를 베푸는 수밖에 없었다.
지나친 측은지심이 아니라 의료인으로서 할 수 있는 선에서의 관심.
정말 이럴 때 하는 게 맞다는 것을 느꼈다.
항암 치료 후 힘들어서 오신 걸 알기에, 열이 더 나는지, 울렁거리는 건 없는지.
추우면 담요 한 장을 조용히 덮어 줄 수 있는 정도.
아마 친구를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친구는 수술에 성공했고 항암을 마치고 정기검진을 다니게 되었지만.
결국에는 완치를 1년 앞두고 폐로 전이되었고, 복부 장기 쪽으로 전이가 되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기도했던 것들, 내가 행했던 마음속의 봉사들은 다 모두 쓸모없는 일이었던 걸까?
왜 아직 더 살 수 있는 나이인데.
그런데 더 젊은 사람도 위암, 유방암으로 가는 걸 봤다던 그 친구.
친구가 스스로 사전 연명의료 서류에 사인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우리 병원으로 왔던 그 밤.
정말 자지 않던 막내를 업고 가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그때 가서 만난 30분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이었다.
’와 줘서 고마워! 나 피곤하니까 좀 잘게...‘
그다음 날 아침에는 이미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고 그렇게 오후 늦게 눈을 감았다.
아팠던 친구의 속상함을 뒤늦게 알았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옆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삼일을 함께 하고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인사를 가던 것도 코로나로 2년째 못 갔다가 최근에 시할머니의 덕에 오랜만에 친구를 보고 왔다.
여전히 환한 얼굴로 내게 잘 지내냐고? 물어봐주는 듯한 그 표정.
그 친구로 인해 남은 6명은 전원 유방 검사와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다.
가장 늦게 검사받는다고 혼나던 나에겐 갑상샘에 약간의 물혹이 다였다.
친구가 우리에게 준 건 건강을 챙기라고 던진 신호탄이었고, 나에게 준 건 좀 더 주변에 관심 두고 건강전도사를 하라고 하는 듯했다.
아마 그맘때쯤 원장님께서도 30세 이상이면 제발 유방 x-ray랑 초음파를 정기적으로 할 수 있게 선배들이 먼저 챙기라고 한 번씩 말씀하셨다.
근처 병원 선배였던 분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기에 더 우리에게는 자극이 되었나 보다.
그 덕에 후배들은 졸지에 모두 한 명씩 검사하기에 이르렀고, 타 부서의 직원들은 뭔가 혹이 발견되어 간단하게 시술로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계기였다.
건강은 예방이 우선이라고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계속 홍보하고 다녔던 듯하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도 한 명씩 검사를 받으면 정말 유방, 갑상샘에 뭔가가 보여서 1년 뒤에 오세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고.
나의 오랜 벗도 부산에 혼자 사니 검사 잘하라고 신신당부한 덕에 유방 검사 후 석회화로 인한 거라고 간단한 시술 후 다행히 정기검진을 받고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한 나의 마음이었겠지만.
그 뒤로 나는 누군가 물어보면 나라에서 해주는 검진은 무조건 받으세요!라고 한다. 방법까지 가르쳐 주면서.
유방암 앞에서 좌절한 적은 있지만, 나의 간호하는 방법에 무릎을 꿇은 건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
오히려 좀 더 누군가가 물어보면 더 먼저 대답하고 건강검진 센터로 안내하게 되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 대한 부분도 좀 더 신경을 쓰게 되면서 교대하는 그들에게 조금은 나은 근무를 제공하려고 더 노력했다.
스트레스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기에 그 부분을 줄이게 하려고 참 노력했던 듯하다.
친구와의 이별.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지만, 그 이별을 아파할 시간조차도 출근하면 억눌러야 했기에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예방을 강조했던 듯하다.
"간호사 무섭다고 하더니, 정말 잘하고 있네.
역시 책임감 하나는 끝내줘!
그곳에서 친구가 외쳐 주는 듯하다!
내가 두 배로 더 열심히 살아볼게!!
지켜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