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없이 40대 부부가 살아가는 법

네덜란드 드래곤 여행기의 결심

by 강윤선

최강 커플


정말 갑자기 6개월 만에 결혼했습니다, 자연의 섭리 같은 순리였습니다. 옥수동에 신혼집을 꾸렸습니다.

둘 다 20대부터 이어진 외국 생활로 집다운 집은 서로에게 처음이었습니다.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짐들을 같은 공간에 풀었습니다. 남편의 짐은 간소했습니다. 여러 가지 담긴 플라스틱 투명 박스, 상자 등이 있었는데 내 짐들과 닮아있었지요.

나의 플라스틱 상자에 들어있는 잡동사니는 승무원 시절 비행하며 사 모은 외국에서 발견한 소품들입니다. 청춘의 영광스러운 잔해물이지요. 포장도 뜯지 않은 나의 애장품들은 언젠가 결혼을 하면, 새집에서 써야지 하면서 포장 그대로 묵혀온 것들입니다. 낯선 나라에 도착해서 정해진 짧은 시간 동안 아찔하게 누렸던 내 발로 직접 걷는 장소들, 내가 들은 직접적인 감각들이 아득해져 점점 그 시기의 느낌들이 애틋해지곤 합니다.


애지중지 여기까지 끌고 온 무성한 잡동사니에 웃음이 났습니다. 안쓰러운 등을 보는 거 같았지요. 지켜내고 싶었던 외국 생활 내공의 흔적임을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그래봤자 종이류가 대부분이었는데 외국에서는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은행 서류, 비자 서류, 학위증명서 등의 자료들이 언제나 따라다녔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흔적들은 그대로 상자 속과 가방 속으로 묻어 뒀습니다. 한국에 왔으니 더는 증명할 일이 없었습니다. 안심하고 마음을 내려놓듯 짐을 풀어 내려놓았습니다. 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새롭게 만들어 갈 준비를 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우리의 취향을 담은 물건을 하나씩 사들이다 보니 감각 있는 물건들로 가득 찬 편집숍 같았습니다. 늘 어딘가로 떠날 준비에 익숙해서인지 한국에서 이렇게 차려놓고 살아도 될까 싶었습니다.

처음 2년간의 결혼생활은 평온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얼마 지나자 일상에 편안한 리듬이 생겨났고, 주말이나 휴일이면 미술 전시회에 가는 등 서울 생활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문화, 예술, 브랜딩 기획 대화가 잘 통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미술관에 간다고 하면 데려다주고, 전시회 보러 가자면 따라가고 내가 말할 친구가 없어서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남편이 들어주고 맞춰주어서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산 지 너무 오래되었을까요? 여전히 꿈을 꾸며 도전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평범한 일상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꿈쟁이 남편을 만나 꿈 찬 여자는 여전히 붕 떠 있었습니다.


Lemon Tree

남편의 고등학교 때 별명은 리몬(터키어 Limon: 레몬). 그는 터키에 있는 독일학교에서 유일한 한국 아이였습니다. 독일학교에서 반 친구들과 바에서 테킬라와 레몬을 자주 먹었다고 했습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나무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남편 별명과 같은 레몬 나무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말에 양재꽃시장을 갔습니다. 코끝에 상큼한 레몬 향기가 나서보니 노란 레몬 3개가 달려있었어요. 지중해 햇살이 느껴지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났고요. 15년 된 레몬 나무라고 했습니다. 다 늙었는데 이 나무가 계속 레몬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길고 얄쌍한 가지에 달린 레몬은 마른 여자가 임신하여 배만 뽈록 나온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레몬처럼 둥근 배를 갖고 싶었습니다. 온전히 다 자랄 때까지 가지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말아라.

가장 크고 잘 익은 레몬이 먼저 떨어졌습니다. 한동안 먹지 않고 냉장고에 두었습니다. 첫 수확물이라 집에 손님이 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자고. 며칠 후 뒤통수 너머로 툭 하고 소리가 나더니 두 번째 레몬이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한 개가 남았습니다. 조마조마합니다. 아직 덜 익어서 푸르스름한 점들은 아기 엉덩이 몽고반점 같았습니다. 영양분이 부족한지 피부가 쭈글쭈글하다. 탯줄에서 흙의 영양분을 받고 있기는 한 것인지 불안합니다.

결국, 열매가 다 지고 그 자리에 배꼽 딱지 같은 게 생겼습니다. 햇살을 충전하고, 새로운 자리에 꽃봉오리가 착상했습니다. 흰 레몬꽃이 피었습니다. 꽃에서도 신기하게 레몬 향이 납니다. 레몬 나무도 레몬을 낳는데, 초록 잎에서도, 꽃에서도 가지에서도 레몬 향이 나는데.

우리는 늦은 결혼을 했죠. 아기가 생기지 않아 시험관 아기를 준비했습니다. 화분에 화초 영양제를 꽂듯이, 나도 배에 주사를 찔렀습니다. 내 아랫배는 보라색이었다가 파랗게 되고, 노란색 멍이 피었습니다. 주기마다 초음파와 주사의 연속에도 지친 적이 없습니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임신을 입에 떠먹여 줄 거 같은 족집게 학원에 다니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자연임신이 될지도 모르니 오히려 병원에서 부부에게 내주는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시험관 아기를 냉동 이식했습니다, 2주 후에 임신이 되었는지 피검사를 통해 알 수가 있었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피가 말라갔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임신 테스트기를 샀습니다. 내 인생 첫 두 줄이었습니다.

첫 시험관에 바로 성공했습니다. 난 오늘부터 임신 2주 차 임산부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도 생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으로 벅찼습니다. 자주 졸기도 하고, 과일, 생선이 나오는 맛있는 꿈에서 깨면 둥그레진 팔뚝과 가슴을 부대끼며 화장실에 자주 갔습니다. 커진 자궁만큼 두둑해진 뱃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레몬 나무 앞에 종종 앉곤 했죠. 내 몸속에 자라는 작은 생명과 함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매끈한 광이 나던 잎들이 푸르퉁퉁해지더라고요. 잎맥은 나이 든 손가락 관절처럼 도드라졌고요. 레몬이 열리고 꽃이 핀 지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레몬 나무에 열매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대로 멈춘 거 같았습니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며 물주는 날도 잊지 않았습니다. 식물 영양제를 흙에 90도로 꽂으며 이번엔 어디가 좋을지 살피는 내 모습은 내 아랫배에 주사를 놓을 위치를 멍 자국을 피해 살피는 심정이었습니다.


임신 3주 차였을 때, 병원에서 피검사 수치가 지난주에 비해 높아져 정상수치였습니다. 매주 고비입니다. 오랜만에 나무를 구경하러 가자고 남편을 졸랐습니다. 우리 집 레몬 나무가 왜 그런지,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는지 가서 물었습니다.

햇빛과 수분이 집이랑 맞지 않아서 잎이 그런 거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야 하는데 안 그런 건 한 마디로 사람으로 표현하자면 유산이 된 거지.

꽃집 아저씨 입에서 기분 나쁜 단어가 나와 거북했습니다. 괜스레 배가 움찔했습니다. 재수 없어서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고 여기서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땐, 모든 게 예민하고 조심스러웠지요.


4주 차가 되어 초음파를 보러 갔습니다. 아기가 잘 착상을 했는지 볼 수 있었어요. 자궁에 점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매일 프로기노바 3번과 질정을 넣었습니다. 아직 성별도 모르는 아이를 지켜주려고 격일로 배에 주사도 맞았습니다.

5주 차에 초음파로 아기집이 커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6주 차에 아기집 안에 난황도 생겼고요. 생명이 찾아오는 기쁨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7주 차에 아기집이 커지고 태아 심장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주변 사람들한테 임신했다고 임잉아웃을 해도 될까?

그런데 얼마 후, 불그름한 피가 났습니다.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네이버에 검색을 해봤는데 불안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질정을 끊고 엉덩이 주사를 일주일간 맞았습니다.


8주째가 되던 날, 한 주 동안 출혈이 있어서 초음파를 보러 아침 일찍 병원에 갔습니다. 모니터로 초음파를 보는데, 아기집 크기가 지난주와 차이가 없다고 하더군요. 아직은 아기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 후, 3일 동안에도 피가 계속 났습니다. 9주 차에 다시 초음파를 보러갔습니다. 아~이제는 더 이상 아이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텅 빈 진공 속에 웅크리고 멈춰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다음 주에 아기를 떠나보내는 수술을 하자고 했습니다. 내게 왔던 그 아이를 너무 쉽게 잃고 말았습니다. 너무 조바심과 스트레스를 갖지 말라고 그럴수록 더 힘들 거라고. 경지에 이르러야 자연스럽게 아기 천사가 찾아온다고. 내가 노력하면 뭐든지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조바심과 긴장을 늦추고 힘을 빼고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아기가 편하게 찾아올 수 있도록 편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질정과 주사를 끊자 며칠 후, 붉고 뜨거운 피가 하체에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내 몸 안에서 송두리째 쏙 빠져나가니 아무것도 아닌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리 사이에 머리를 숙이고 변기통에 가득 찬 붉은 피를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8주간의 기쁨과 설렘과 기대감에 배보다 내 마음이 더 부풀었었는데, 내 몸에서 쿵 하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발 붙어있으라고 아픈 배를 움켜잡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우리의 아기를. 내 안에서 석 달을 간신히 넘기고 뚝뚝 녹아 흘러내렸습니다.

포기하는 체념으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임산부의 기쁜 출렁임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이야기로 아이 없는 인생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도 3년 동안 12번의 시험관 시술과 3번의 인공수정을 했습니다.

40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이 없는 삶을 각오는 했지만, 노력해 봐서 후회는 없습니다.

정말 나도 아이를 하나 낳았어야 하는 건데, 결혼한 지 6년이 되었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나 늙어서 그렇다고 받아들였지요. 그 후 내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아이도 없으니 내가 결혼한 여자인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여자가 나이 들면 아내가 아니면, 엄마로서 사는 거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친정에서 혼자 지내니 아내 역할도, 엄마 역할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효도하는 딸내미도 아니고요. 나에게 아이가 없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을 못 하는 어쩔 수 없는 일도 내 인생에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받아들이게 되니까 포기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되겠다는 상황으로 귀결돼 갔습니다.


이제 우리 둘이서 아이에게 쏟을 사랑과 에너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며 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