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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프장으로 소풍 간다

스윙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폼폼토스

도로를 활보하는 소떼, 자동차 창문을 두드리는 거지, 10차선 넘는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사람들, 길가에 쌓인 쓰레기. 이제는 이 풍경에 적응이 될 만도 하건만, 참을 수 없이 유독 힘들게 다가오는 날이 있다. 처음 인도에 왔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잊을만하면 뒤통수를 치는 인도의 길거리 풍경은 이곳이 새삼 살기 힘든 나라라는 걸 일깨워 준다. 나는 공감을 잘하는 타입이라서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덩달아 마음이 힘들어지곤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았는지, 그동안 얼마나 좋은 곳들을 여행 다녔는지 깨닫게 된다.


작년 여름 아이와 함께 영국 런던을 여행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지하철과 버스를 탔고, 공원을 찾아다녔고, 길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어디를 가나 인도(sidewalk)가 잘 닦여 있다는 게,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있다는 게 새삼 충격적이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두 발의 자유였던지, 매일 만 보 이상씩 걸었지만 아이도 불평 없이 잘 따라다녔다. 인도엔 인도가 제대로 없고, 횡단보도와 보행자 신호등은 아예 없다. 그래서 집 앞에 잠깐 나가려고 해도 차를 차야 한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유, 대중교통을 타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자유가 없는 나라다.


그 말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관광지에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인도는 기사가 운전해 주고 메이드가 청소해 주니 내가 하는 건 가족들 먹을 음식 요리 정도. 시간은 넘쳐나는 데 할 일은 별로 없다. 팔자 좋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넘치는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보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골프에 빠지게 된 것 같다. 골프야말로 시간을 아주 많이 필요한 취미이니 말이다. 인도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가이자 사치다. 그러나 나는 골프 자체보다도 골프장이 좋다.


골프장에서는 두 발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 별로 걸을 곳 없는 인도에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 1000보 걸을까 말까인데, 골프장만큼 걷기에 안전하고 깨끗한 곳이 또 없다. 그래서 나는 아주 더운 여름만 빼고 트롤리를 끌고 걸으면서 골프 치는 걸 즐긴다. 좋은 날씨에 초록의 잔디 위를 걷고 있으면 공 좀 안 맞아도 기분이 정말 좋아진다. 미세먼지로 뿌연 겨울도 마찬가지다. 인도 북부의 겨울은 꽤 추운데 걷다 보면 추위도 사라지고 몸도 풀린다.


골프장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름 모를 빨간색, 보라색, 노란색 꽃이 피는 꽃나무들이 철 따라 피며 골프장을 장식한다. 꽃이름은 잘 모르지만 빨간 꽃이 필 때쯤이면 봄이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꽃향기를 맡으면서 티샷 하는 기분을 아는가? 그야말로 힘이 솟는 기분이다. 골프 치다가 오디를 따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4월은 오디가 열리는 계절이다. 티샷을 기다리다가 캐디들이 오디나무를 흔들어 한아름 따다 준 오디가 내가 인생에서 처음 먹어 본 오디였다. 자주색으로 막 익어가던 오디는 신 맛 하나 없이 너무나 달콤했다.


그린 위로 산책 나온 산새 가족을 만난 적도 있다. 5월은 새가 알을 품고 새끼가 나오는 계절이다. 골프장에 가면 항상 보는 이름 모를 산새가 어느 날부터 페어웨이 옆 러프에 몸을 부풀리고 앉아 있었다. 공이 그 근처로 떨어져서 가까이 가니 빽빽 있는 힘을 다해 나에게 소리 지른다. 알고 보니 알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린에서 퍼팅을 하고 있는데 작고 귀여운 새끼 새가 그린 위를 통통거리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품던 알에서 새끼가 나왔나 보다. 너무 귀여워서 일행들과 나는 잠시 퍼팅을 멈추고 그 새를 구경했다. 새끼 뒤에는 엄마 아빠로 보이는 새가 쫓아다니고 있었다. 새들도 애 키우느라 힘들다고 일행들과 웃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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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을 멈추면 만나는 평화로운 순간들

골프장에서 먹는 음식은 꿀맛이다. 나는 한국에서 골프를 친 적이 없어서 그늘집 가서 식사한다는 얘기를 듣기만 했지 직접 먹어본 적은 없다. 내가 다니는 골프장은 그늘집 대신 곳곳에 음료 스탠드가 있다. 커피, 아이스티, 레모네이드 등 원하는 대로 주문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건 그린피에 포함이다. 나는 주로 텀블러를 가져가서 카트에 놓고 먹는다. 무더운 여름 아이스 아메리카노, 추운 겨울 마살라 챠이를 마시며 골프 치는 기분이란! 더위도 추위도 음료 한잔에 날려 버릴 수 있다. 물론 음료 스탠드의 위생 상태를 보면 여기가 과연 인도구나 실감하게 되지만 그거 먹고 배탈 난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으니 앞으로도 더욱더 열심히 마셔줄 것이다.


한국만 배달 문화가 잘 되어 있는 게 아니다. 클럽하우스로 음식을 주문하면 내가 치고 있는 홀로 배달해 준다. 나는 골프 치면서 간식을 잘 먹는 편은 아닌데, 어느 날 전반을 돌고 나니 너무 배가 고픈 거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클럽하우스 배달을 시켜 보았다. 10번 홀에서 주문했는데 12번 홀로 정확히 배달된 샌드위치는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걷고 있으니 골프 치러 온 게 아니라 마치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깨끗한 곳을 걸을 자유 없는 이곳에서, 걷고 운동하고 먹고 마시고 풍경을 감상하는 그 모든 걸 할 수 있으니 골프장은 과연 인도 최고의 장소다. 한국에 있었다면 비싼 그린피와 점수에 대한 스트레스로 이렇게까지 골프장을 즐기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남은 주재 기간 동안 마음껏 골프장을 즐기려고 한다. 실력까지 오르면 더더욱 좋겠지만, 점수에 너무 매여서 잘 안 맞는다고 의기소침해하기보다 소풍 나온 기분으로 4시간을 즐기다 가는 거다. 그래야 이곳에서 또 살아갈 힘이 생기니까. 나에게 골프장은 충전의 공간이다. 그리고 마하라자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음 화 '골프장의 마하라자’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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