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 캐디와 함께 하는 황제 골프
“마담, 내일 몇 시에 올 거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은 골프 치는 날이다. 매주 고정된 일정이건만 캐디 Y는 그 전날 저녁에 꼭 확인 메시지를 보낸다. 시간 개념 희미하고 약속을 숨 쉬듯이 깨는 인도인 답지 않다. 인도에 살면서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 점에서 일단 가산점 먹고 들어간다.
그의 장점은 또 있다. 마담과 캐디 사이의 선을 지킨다. 골프를 치다 보면 샷이 잘 안 맞았을 때 추임새 넣는 캐디들이 있다. “뒤땅”, “헤드업” 등 그래서는 안 되는 걸 나도 다 알지만 그저 또 몸이 안 따라줘서 잘못 친 걸 꼭 빈정대는 말투로 지적한다.
칠 때마다 자세를 가르치려 드는 캐디들도 있다. 그러면 집중해서 치기 어렵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면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Y는 잘 칠 땐 좋아하고, 못 칠 땐 조용하다. 또한 잘못된 포인트를 기분 나쁘지 않게 지적할 줄 안다. Y가 지적한 부분을 고치면 정말 기가 막히게 공이 잘 맞는다. 캐디 이상의 필드 레슨 코치이다. 그래서 그는 내 고정 캐디가 되었다.
고정 캐디라는 게 특별할 것은 없다. 내가 골프 치는 날 다른 사람의 캐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관계다. 물론 팁을 좀 더 주긴 한다. 일찍 오는 다른 사람의 캐디를 할 법도 한데 Y는 그런 적이 없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 때문에 그런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꼭 Sir, Madame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대접하는 분위기가 있다. 캐디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황송하고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했지만 이제는 마치 황제라도 된 양 신나게 서비스를 즐긴다. 여긴 인도니까!
골프장에 도착하면 차에서 골프백을 내리기가 무섭게 캐디가 들고 가 카트에 실어 놓는다. 락커에서 나와 골프 코스로 나가면 아이스커피와 물을 챙겨다 준다. 그리고 그늘집에 들를 때마다 마담이 원하는 음료를 주문해서 가져다준다. 나는 1번 홀에서는 늘 아이스커피, 그 후에는 아이스티를 마시는데 어느덧 마담의 음료 취향도 외워서 말하지 않아도 척척이다.
티도 꽂아 준다. 이건 내가 다니는 골프장 캐디들이 유독 더 그러기도 하는데, 다른 골프장에서 치다가 나도 모르게 티박스에서 티도 꽂지 않고 기다렸던 경험 뒤로 웬만하면 티는 내가 꽂는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좋은 습관이 아니므로 인도에서만 누려야지 싶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그린에서 동반자의 퍼팅을 기다릴 때 우산을 씌워 준다. 진상이 따로 없다. 캐디가 몸종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부려 먹고 있으니.
“마담, 마하라자(힌디로 ‘대왕’이라는 뜻) 서비스야.
해가 뜨거워. 에너지를 아껴야지.”
기겁하며 그러지 말라는 나에게 Y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Y는 이 모든 걸 참 즐겁게 한다. 그럴 때면 샷 안 맞는다고 성질을 부리다가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렇게 다 떠받들어 주는데 난 뭐가 부족하다고 불평인지.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마하라자 서비스를 즐기면서 매너 있게 쳐야지 싶다.
Y는 훌륭한 사진사다. 사람 보는 눈은 다 같다고, 사실 그는 한국 마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캐디였다. 내가 운 좋게 요일이 잘 맞아서 그를 고정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대로(?) 한국 마담들하고만 플레이해서 사진 찍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귀임 시즌이 되면 마담들은 골프장 이곳저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마담 여럿을 귀임시킨 경력자답게 그는 나와 동반자들의 사진도 다리가 길게 잘 찍어 주었다.
“마담, 오늘은 우드 한 번 쳐 봐. 여기 경사가 좋아.”
이 모든 장점 위에 더욱 훌륭한 것은 Y는 코치로도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구력이 얼마 안 된 나에게 이 점은 매우 도움이 된다. 뒷팀이 여유로운 날이면 어프로치 할 때 계속 새 공을 던져 준다. 그린에서도 마찬가지다. 홀인 하고 나서도 퍼팅 연습하라고 이리저리 공을 놔준다. 그는 정말 매사에 열심이다. 그 모습을 본받아 나도 열심히 치게 된다.
그래서 골프장만큼은 내 세상, 나는 그곳에서만큼은 마하라자다. 한국에 돌아가면 12시가 지난 신데렐라처럼 서민이 될 테니 이 사치를 기꺼이 누릴 테다. 오로지 공만 열심히 치면 된다. 얼마나 좋은 삶인가! 인도는 살기 쉽지 않지만, 골프가 있어 버틴다. 그래서 나는 골프를 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