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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서로의 마음이 닿는 그 지점에서

by 사랑


아이를 둘러싼 마음은 셋이다.



센터의 마음, 부모의 마음, 그리고 아이의 마음.

그 셋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아이는 혼란 없이 자라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어긋날 때, 아이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방향을 잃는다.



지역아동센터에는 등원 시간과 규칙,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다.

아이들이 책임감과 일관성을 익히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이 다를 때가 있다.


“머리 아프다는데 굳이 보내야 하나요?”

“오늘은 가기 싫대요. 그냥 집에 있게요.”

“공부하는 게 싫어서 안 가고 싶대요.”


아이가 센터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할 때,

그 말이 매번 받아들여지게 되면 아이는 이렇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원하면 빠져도 되는구나.’

‘센터는 꼭 가야 하는 곳이 아니구나.’


이런 태도는 점점 센터 생활에 흔들림을 만든다.

출석만 하고 집에 가는 아이,

캠프나 체험활동이 있을 때만 등장하는 아이,

학습이나 정서 프로그램은 회피하면서

센터를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공간’으로 인식하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센터는 모든 아동에게 공평하게 교육과 지원을 제공한다.

하지만 부모의 선택적 태도는 센터가 설정한 방향성을 흐리게 만들고,

그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또래 아이들에게도 혼란을 준다.


“왜 나는 다 하는데, 저 친구는 안 해요?”

“쟤는 왜 매일 안 나와도 되는 거예요?”


아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기고,

서로 다른 기준 속에서 ‘함께 자람’은 어려워진다.


센터는 각 아동의 발달 상태에 따라 학습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교육을 고민하며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아동이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을 볼 때

선생님도 함께 기뻐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동기를 얻게 된다.

아동과 센터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장의 흐름은

부모가 센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센터를 단지 잠시 맡기는 곳으로 여기고,

‘필요할 때만’, ‘원할 때만’ 보내는 구조가 반복된다면

아동에게는 이 공간이 결코 ‘나를 키워주는 공간’이 될 수 없다.


지아(가명)라는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입소 당시, 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아동이었다.

학습의 공백이 있었고,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센터는 지아의 현재 상태를 먼저 파악하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한 문장씩 읽고, 단어를 따라 쓰고,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감정을 나누고

조금씩 줄거리와 생각을 쓰는 연습을 했다.


1년 뒤, 지아는 글을 읽고 쓰는 데 점차 익숙해졌고,

문제를 통해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글로 표현하거나,

독후감을 통해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여전히 받침이 다 맞지 않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이 아이는 분명히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만약 지아의 부모가

“지아가 오늘 가기 싫대요.”

“이번 주는 안 보내려구요.”

라는 태도를 보였다면,

이런 변화는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센터의 정체성은 센터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동, 부모, 센터.

세 존재가 함께 마음을 맞출 때

비로소 아이는 흔들리지 않고, 안정된 공간 안에서 자라날 수 있다.


과정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의심된다고 멈추면

그 선택이 또 다른 결과를 만들게 된다.


서로 다른 마음이 부딪히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걸음이 이어질 때

아이의 자람은 그 안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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