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두드림을 포기하지 않은 비처럼
을지로 좁은 인쇄골목에
곱사등이 식자공이 있었다
청년시절 그의 등은
꼿꼿하고 반듯하였으나
나무판에 심은 글자처럼
자신을 굽히고 낮추었다
조판할 활자들을 고르는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
어지럽게 흘려 쓴
제멋대로의 필체를 읽어내어
하나의 오타도 없이
완벽하게 조합하는 멋진 솜씨
그는 농부의 심정으로
나무판에 지식의 씨를 뿌리고
책 속에 영혼의 양식을 쌓는
장인의 자부심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낡은 기술이 폐기될 때
그의 어깨에 자부심을 주던
견장은 떨어지고
밥 한 공기에 김치보시기
입가심으로 맹물이어도
출판된 온전한 서책을 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는데
천직을 빼앗고 밥그릇마저 뒤엎는
잔인한 세상 탓에
식자공의 주름은
깊은 절망의 눈물자국이었다
식자공은 손에서 떨어진
둥근 동전 한 닢이
제 살길을 찾아
구르고 구르는 걸 보고는
아무리 좋아도
변한 시절에 유용하지 않다면
과거의 말뚝에서
그 고삐를 풀어야 함을 알았다.
냉골에 죽은 듯 누운
절망의 그날
잔치 집을 뛰어다니는
아이 같은 비가 내렸다
지상의 막다른 골목에서
깨어질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비는
희망의 두드림을 포기하지 않을까?
비는 세상의 모든 벽이
건반이며 음악이라고 말한다
추락이 마지막 혹은
절망이라고 말하지 않고
두드리면 열리는 시작이
희망이라 말하는 저 비처럼
비 그치는 내일
그는 무엇이든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