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주는 무한정 무료인 사랑의 축복
"늙은 동지여, 아직도 너의 이기심은 자비롭게 나이 들지 않는구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배려심 없고 자기중심적인 건 변하지 않는구나. 어긋났다고 죽자고 다투던 젊음이 시간의 풍화를 견뎠다. 네가 변하지 않는다면, 내려놓음의 경지에서 이제 나는 너를 이해하려 한다."
천일만두에서 점심을 먹었다. 치킨 만두와 볶음밥을 시켰다. 두 음식 모두 기름에 볶고, 튀겨서 건강에 좋은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옆 테이블에서 마파두부를 먹는 젊은이들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맛은 좋은데 끝에 매운 향이 강하다고 했다. "매운 향이 강하다는데 먹을 수 있겠어?" 석이 물었다. "너의 뜻을 따르겠다."라고 들리지만 실은 "먹지 말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석의 말 이면까지 해석하는 신비로운 나이가 됐다. 죽자고 어긋났던 젊음이 늙어 동지가 되었다.
튀긴 만두는 겉이 바삭하고 육즙은 살아 있었다. 볶음밥은 살짝 향신료의 맛이 느껴졌다. 석이 인터넷에서 검색한 바로는 주방장이 중국인이라고 했다. 어쩐지 이국의 맛이 느껴지더라. 낯선 향신료도 거부감 없이 잘 먹는 내가 되었다. 쑥갓, 고수, 미나리도 느끼함을 잡아주어 듬뿍 넣을수록 좋다. 순정한 입맛이 변해 무엇이든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세월이 변하게 한 내 모습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점심을 먹고 제주 치유의 숲에 갔다. 예약한 숲 프로그램 시간보다 20분가량 일찍 도착했다. 숲 지도사님을 기다리며 어슬렁거리다가 제주도 향토 음식인 빙떡이 3개에 오천 원인 것이 눈에 띄었다. 빙떡은 메밀을 얇게 펴 무채를 돌돌 말아 구운 것으로 뻥튀기에 올려줬다. 뻥튀기는 그릇 대용이라고 했다. 강원도에서 먹었던 메밀전병이 떠올랐다.
어젯밤 석이 예약한 숲치유프로그램은 2시간 코스로 비용은 무료였다. 숲지도사님을 만나 다른 일행을 기다렸다. 옆의 유료 숲프로그램은 참석자가 많은데 비해 우리 프로그램은 예약자 9명 중 참석한 사람이 우리뿐이었다. 무료예약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쉽게 약속을 어기게 된다. 현실적인 필요에 덜 부합할리 없지만 무료는 쉽게 포기하여 기회를 놓아버린다. 숲지도사님이 불참한 사람 때문에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숲지도사님은 칠십이 넘어 보였고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말이 새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하지만 열의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았고 걸음걸이는 우리보다 힘이 넘쳤다. 호근 산책길을 거쳐 가베또롱 치유숲길을 지나 엄부랑숲 집터까지 걸어간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산은 개인선택에 맡긴다고 했다
버섯재배 장소인 물통 앞에서 버섯의 윗부분인 삿갓은 생식기관이며 꽃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하셨다. 균사체는 유기양분을 무기물 분해한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썩고 분해되어 다시 새 생명에 전해진다는 말도 하셨다.
갑자기 사랑의 유통기한을 말한 한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영화는 유통기한이 없는 사랑을 바라지만, 나는 썩지 않고 자기 혼자 영원하고 싶은 욕심이 순환하는 자연계를 해치는 이기적인 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하는 생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생강과 생김이 비슷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삭줄은 꿀벌들이 꿀을 채취하는데 독성이 있으니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제피잎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익숙한 냄새였다. 제주에서는 제피를 향신료로 쓰는데 맛이 산초와 비슷하다고 했다. 어쩐지 추어탕 먹을 때 넣었던 산초냄새와 비슷해서 익숙하게 느꼈구나. 제피와 산초를 구별하는 방법은 잎이 마주나는 것은 제피고, 어긋나는 것은 산초라고 하셨다.
천남성은 강한 맹독을 지닌 독초로 사약 재료로 쓰인다고 했다. 사극에서 장희빈이 사약을 먹고 피 토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사약에 천남성이 쓰였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으로 궁녀로 입궁하여 아름다움으로 숙종의 총애를 얻었으나 아들을 낳고도 남편이 내린 사약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장희빈은 지금으로 치면 남편의 살해 사주로 독살됐으니 용감한 형제들의 좋은 소재감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왕실과 사대부 중심의 남성들이 주도하는 양반사회로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내쫓거나 권력욕이 많고 질투가 심하면 죽일 수도 있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의 희생양으로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악을 쓰던 장희빈의 모습은 사랑 또한 유통기간이 다해 버려진다면 찌그러진 캔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내장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자귀나무는 밤에 이파리가 합쳐져서 부부의 합환수라 불린다고 하셨다. 그리고 열매 부딪는 소리가 수다떠는 것 같아서 설와수라고도 불린다고 하셨다. 밤에 숲에 와서 혼자 자귀나무 이파리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귀는 귀신이 연상됐다. 나무의 애틋함이 밤에는 한이 서려 무서울 것 같았다. 밤에는 수다떠는 소리가 곡소리로 들릴 것이다. 한계령이란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인간은 인간세계에서 잠들고 자귀나무는 한적한 밤중에는 저들끼리만 속삭이고 싶을 것이다.
예전에 구시잣밤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가 사람들이 싫어해서 모두 베었다고 하셨다. 6월 어느 날 친구들과 양평의 소리산을 지날 때 차장을 스치던 음탕한 지린내가 기억났다. 그것은 밤꽃의 냄새였다. 밤꽃이 하얗게 피어서 멀리서 보면 좋았다. 하지만 후각을 자극하는 그 독특한 향은 맛있는 밤을 주어도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선사한다. 꽃 피는 계절만 지나면 알토란 같은 밤들이 열려 우리의 간식을 책임져 준다. 그러니 냄새쯤이야 참아낼만할 것도 같았다.
밤꽃은 암내를 고민하던 친구를 떠오르게 했다. 너무 예뻐서 멀리서 보면 사귀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체취는 사람들과 사귈 때 장애물이 되었다. 수술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지금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청정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때의 한을 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는 수술 같은 것을 할 수 없으니 그저 많은 밤송이들을 퍼주고 저리 늠름하게 생존하는 것이다.
사랑받지 못해도 마냥 퍼주며 안간힘 쓰는 무료의 것들이 많아서 알게 모르게 누리고 있는 행복에 감사하고 싶다. 어쩌면 무료인 모든 것들(공기, 물, 바람...)은 가장 큰 자연의 나눔이며 사랑이다. 그 사랑 안에 나 살고 있으니 사랑받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이미 충만한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고 삶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