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친구로 만들려고 했을 때 나는 가장 외로웠다.
몇 일 전 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히 발견한 저 구절이 내 마음을 뭉근하게 잡아챘다. 나의 오랜 친구들이 없는 낯선 타지에 머무르다 보니 그리움이 커져서 그런 걸까. 단 몇 초의 시간동안 몇 명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말을 하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나를 지지해줄 사람들.
이제야 밝히지만 난 어릴 때 왕따를 참 많이 당했다. 엄마 직장 때문에 잦은 이사가 일상이었고, 초등학교를 세 군데나 다닐 정도로 전학도 많이 다녔다. 수업시간에 나는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고, 내가 책을 통해 배우고 느낀 것을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널리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게 급우들에게는 아마도 ‘잘난척하고 나댄다’ 라고 받아들여졌던거 같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내 자신을 억누르고 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인간관계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다 배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정글과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 세번째 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 서른 다섯명 정도되는 반에서 여자아이들은 열 여덟명 정도였고 네 무리정도로 나뉘어 놀았다. 늘 그렇듯 나머지 세 무리는 조금씩의 다른 특색을 공유하는 조용조용한 아이들로 구성되었고 나머지 한무리가 여왕벌의 무리였다. 여왕벌의 엄마는 학부모 임원을 맡았었고 온갖 학교 행사에서 그녀의 엄마는 늘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처음 전학왔을 때 여왕벌인 K양은 나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였지만, 그녀가 나에게 수학숙제를 베끼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거절한 이후 나는 모든 여자무리의 활동에서 배제되었다.
알뜰시장이 열리는 당일에 나와 함께 하기로 했던 친구가 아침 8시에 우리집에 전화해서 ‘K양이 너와 함께 하면 너도 왕따당할거야’ 라고 했다며 나와 코코아부스를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했다. 어린 마음에도 황당했지만 나는 여왕벌 K양에 맞서서 더 당당하고 싶었다. 그 아이의 횡포에 눌리고 싶지 않았고, 그러한 못된 행동이 정당화 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나는 용돈을 털어 학교 후문에서 1L짜리 우유를 몇 통 샀고 메뉴를 따뜻한 코코아에서 시원한 초코우유로 바꿨다. 나와 함께 하기로 했던 L양은 한층 불안한 표정으로 K양이 차린 거대한 분식 부스 한켠에서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나는 작은 책상 위에 네스퀵 가루와 우유를 섞어 두곤 내심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누가 내 초코우유를 살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아무도 안사면 초코우유를 다 버려야 하고 내 일주일 용돈이 날라가는 것 뿐만 아니라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왕따로 낙인찍히는 것이 너무 두려울 것 같았다. 겉으로는 당당했지만 손님을 기다리는 내 속은 유약함 그 자체였다.
K양의 엄포에 여자아이들은 아무도 내 우유를 사러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따돌림에 별 관심이 없던 남자아이들은 하나둘 내 앞으로 몰려와서 초코우유를 한잔씩 사마셨고 나의 우유는 금방 동이 났다. 책상을 다섯 개나 차지했던 K양의 분식 부스는 고추장 양념의 양조절로 상당수의 떡볶이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알뜰시장이 끝나고 단촐한 부스를 정리하던 나에게 K양이 갑자기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오늘 놀이터에서 누구 누구랑 놀다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가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초코우유 완판의 자신감을 등에 업고 매우 쿨하고 당당한 태도로 ‘그래’ 라고 답했다. 그 다음날 왕따는 내가 아닌, L양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나는 L양을 괴롭히는데 동조하지 않았고 그냥 독자적으로 나만의 생태계를 만들고 친한 무리들을 새롭게 형성했다. K양 주변에서 매일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오늘의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리 나는 마음편하게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마무리 했다. 아마 5학년 마지막날쯤 서로 서로 예쁜 편지지에 편지를 주고받을 때, 내가 K양에게 썼던 편지와 답장이 기억난다. ‘K양아 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같았어. 6학년이 올라가면 좀 더 친구들과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라고 내가 편지를 보냈고 그녀는 자기가 그런 인물이 아니라며 행복한 6학년이 되자고 답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한 1년동안 정말 세상을 다 배운 것 같았다. 그리고 느꼈다. 어디에든 나쁜 빌런들이 있고, 그것에 굴복해서는 절대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으면 나를 알아주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여 내가 외롭지 않을 거라는 것.
초등학교에 비해 중, 고등학교때는 학교 생활이 덜 어려웠다. 1차적으로 성적이나 다니는 학원 등으로 친한 무리가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방랑하거나 투쟁할 필요가 없었다. 똑똑한 모범생이었던 것에 비해 재미나게 노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때론 문제가 있었지만 초등학교때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을 갔고 정말 똑똑하고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약간 슬픈 것은 이렇게 성장해오면서 나의 ‘나대는’ 유전자는 많이 사그라 들었고 나만의 빛깔을 많이 잃은 느낌이었지만 대학시절의 나는 여전히 통통거리는 탁구공과 같았다. 대학에 가서 만난 친구들은 동아리와 반 친구들로 나뉘는데 동아리에서 만난 인연들은 정말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연락이 잘 되던 안 되던 마음의 고향과 같이 나의 친구들로 남아있다.
친구와 지인. 대학교를 지나 회사에 오니 그 전까지 만난 사람들이 저렇게 정리가 되었다. 물론 정말 평생을 갈 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한순간 나에게서 돌아서서 슬퍼했던 시기도 있고,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해서 틈만 나면 남편과 다른 친구 앞에서 운적도 있다. 대학 입학, 졸업, 첫 번째 회사 입사, 퇴사, 새로운 회사 입사, 결혼, 출산, 육아를 모두 거치며 나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다. 아줌마가 되어서 참 좋은 것은 친구와 지인을 가르는 지점이 명확히 보인다는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도 빨리 구분되고, 내가 앞으로도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아는 지인 정도로 흘려보낼 사람인지 판단이 너무 쉽다. 그래서 내 친구들에게는 아낌없이 마음을 쏟고 그들을 지지하고 삶을 공유한다. 그리고 나도 친구들이 나를 응원해주는 에너지로 힘을 낸다. 말로만 하는 공감과 지지가 아니라 정말 나를 믿어주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참 많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는 그 따스함이 너무 감사하고, 그게 한명이 아니라는 것이 놀랍고 참 안심이 된다.
나는 여전히 내 회사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스물 여섯에 시작한 이 회사에서 나는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그들과 회사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 삶을 나누고 무엇이 좋은지, 어떤 걱정이 있는지, 마음이 어디가 아픈지 제정신일때도 혹은 조금 취해서도 부끄럽지 않게 이야기한다.
스무 살에 미국에 잠시 있었을 때 가깝게 지내던 언니는 6살 연하의 교포 남자친구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직장상사인 유부남을 잠시 만나기도 했다. 언니가 이 이야기를 나에게 했을 때 스무살의 나는 ‘언니 다 그럴수 있는거야. 그럴수도 있지. 삶이 다양하잖아. 그리고 언닌 지금 상황을 fix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니까 그걸로 충분해. 언닌 좋은 사람이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는 그때부터 나에게 너라면 뭐든걸 다 터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 나는 내가 저 말을 한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랬었나? 싶긴 했지만 나는 내 친구들에게 여전히 저런 존재이고 싶다. 쓴소리도 하고 응원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나아가지 못하는 거 같을 때 마음을 하드캐리 해줄 수 있는 친구. 새벽 1시에 갑자기 ‘자니’ 라고 보내도 불안함보단 반가움이 앞서는 친구.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다 보니 별 얘길 다쓴 것 같다. 그러나 후련하다. 나는 당당한 왕따였다는걸 밝혔으니.
나는 내 멋에 취해 내 친구들과 내내 즐겁게 살 노력만 기울일 작정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가진 짐을 조금 내려놓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일상의 행복함을 찾아 움직이는 하이에나가 되기를! Buenos noches (갑분 스페인어 자랑... 꺅)
사랑해 너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