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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기로 Sep 11. 2021

부동산도 브랜딩이 필요하다

이태원의 힙한 부동산 소개

업무 시간 외에 디자인을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새삼 신기하다. 그러나 나도 처음부터 디자인 프로 열정러는 아니었다. 퇴근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일에 관한 것들은 퓨즈 되었고 연차가 쌓일수록 위기감은 심화되었다. 나는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에이전시, 스타트업, 프리랜서 등 필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하던 재작년 즈음, 결국 퇴사 카드를 선택했다. 여러 고민과 계획, 열정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 것은 일반인들을 위한 디자인 교육, 콘텐츠 제작자가 되고 싶다는 소명의식이었다.



소명의식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한데 ㅎㅎ;; (그렇다 이 거창함 때문에 망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자기소개 글을 다시 읽으니 너무 부끄럽네. 무엇보다 디지털노마드란 워딩 좀 빼고 싶다. 그러나 흑역사도 흑역사기에 놔두자. (사실 귀찮다)


어쨌든 작년의 나는 가히 삽질의 연속이었고, 고통스러웠던 기간을 지나온 지금은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거의 사라진 채,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쓴다. 마음 한 켠에는 유튜브 해야 하는데- 항상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지금의 레벨에서 어울리는 것들을 하고 싶을 때 하고, 억지로 하지 않기. 현재는 이것만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부동산 브랜딩 이야기를 하기 위한 사족이 길었는데, 이건 글을 전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맥락이니 이해 바란다.







어쩌면 내가 퇴사한 이유는

부동산 때문이었을지도

코로나 전,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매년 가을마다 2주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찬란한 광경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들이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렇게 작은 시골 마을조차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미를 추구하는 감각, 개인의 욕심보다는 전체의 조화로움을 우선순위에 두는 이성적인 태도에서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을 위한 배려심마저 전달되었으니까. 인본주의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부러움과 질투 등 여러 감정과 마주한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일상의 서울에 그대로 또 금방 익숙해졌지만 가끔씩 혼란스러웠고, 가끔씩 분노가 일었다. 특히 거리의 좋지 않은 디자인을 볼 때 분노의 강도가 깊어졌다. 전단지, 간판, 명함, 가게의 격을 떨어뜨리는 X 배너, 몹쓸 인테리어 등 사실 이것도 다 디자인 업체에서 했을 텐데 말이지. 그렇지만 이런 작업물을 이런 예산에 발주하고 컨펌한 사람들에게도 미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일 테다. 미의식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거리의 문화로 이어져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간판 천국인 한국의 거리는 인간은 없고 경제만 남게 되었다.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것만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의 콘셉트이라는 게 존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간판 거리는 한국다운 것이라고 하기에 콘셉트도, 통일성도, 아름다움도, 어떤 것도 없다. 이런 거리들이 적게 혹은 크게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방문자의 혼을 쏙 빼놓기로 유명한 오사카의 도톤보리는 광고 구역이 어느 정도 지정이 되어 있다. 또한 키 컬러도 레드, 화이트, 블랙이라는 통일성이 있고, 채도와 명도도 적절히 조절되어 있어 간판 디자인도 하나하나 아름답다. 일본은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색채 미술에 오랜 역사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공공 디자인의 목적지는 대체로 아래 사진처럼 오로지 '눈에 잘 띄는' 것으로 향해 있는 듯하다.


특징 : 강한 채도, 부딪히는 채도의 대비, 주변 환경 신경 안 씀, 폰트에 두꺼운 아웃라인은 필수, 노랑 빨강 선호, 글씨는 납작하게 찌그러뜨리거나 길쭉하게 늘린다. 


이들의 타깃은 대체로 4050 세대다.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별 생각이 없다. 좋은 디자인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왜 나쁜지도 모른다. 4050 세대는 익숙함을 소비할 뿐이다. 거리의 부동산은 한 집 건너 한 집 일정도로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고, 무지함을 무기로 안타깝게도 도시 경관을 해치고 있다.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60204
https://www.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203


일반인들에게
미를 보는 눈을
키워주고 싶다

그래서 퇴사했다. 정말이다. 그리고 서문에서 쓴 것처럼 이런저런 삽질을 반복하면서도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치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앞으로 5년-10년, 단 한 사람이라도 미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피할 수 없다면 사랑하자. 글을 쓰면서 나의 일과 나 자신을 한층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부동산도 브랜딩이

필요하다

이제야 이 글을 쓰게 된 진짜 목적이다. (omg)


흐름은 바뀌고 있다. 4050에서 3040으로 자본과 생산의 중심이 젊은 층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융합한다.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면 1초 만에 따라 하고 싶은 인테리어, 공간 디자인이 쏟아지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좋은 레퍼런스를 수집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지만 최근 이태원 경리단길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네.

브랜딩을 시도한 부동산이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것 아닌가? 아니, 정확히는 노랑 빨강 부동산이 없었다 이태원에는!!! 이태원=부동산이 힙한 지역!!




기존의 부동산이 가지고 있었던 디자인 카르텔 덕분인지 힙한 카페나 레스토랑에 비교하면 약간 신경을 더 쓴 정도지만 이것만으로도 눈길을 확 잡아끈다.


1. 상호의 크기가 적당하다.  

2. 주변과 어울린다. 
3. 난잡한 시세 표기가 없다.
4. 노랑 빨강 파랑 조합을 쓰지 않는다.


부동산을 브랜딩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얼마나 괜찮은 집을 보여줄지 들어서기도 전에 기대가 된다는 점이다. 내가 말하는 '전망 좋은 집'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을 것 같고, 쓸데없이 뺑뺑이를 안 돌게 할 것 같다.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으니, 고객을 배려하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 같고, 자연스럽게 이곳을 방문해 보고 싶어 진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멍석을 고이 깔아놓고 고객이 직접 찾아오게 하는 것. 브랜딩의 기본을 이태원의 부동산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하이라이트는 이 집이었다.

하와이 공인중개사. 문 사이즈가 이렇게 신비로울 것은 뭐람. 왠지 이세계로 나를 안내할 듯 해. 나중에 이태원에서 에어비앤비를 하게 되면 여기부터 찾아가 봐야지. 









글의 마무리도 결국 지극히 개인적인 내 꿈 이야기로 마칠까 한다.

나는 자본이 없어도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대기업, 힙한 브랜드만 브랜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세탁소, pc방, 빵집, 치킨집, 버스, 지하철 등등 공공의 영역까지 미가 침투된 세상을 꿈꾼다. 디자인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요소가 되어야 하고, 그 필수적임이 맥락 없이 꾸미거나 장식한 것이 아닌 논리적이고 타당한 것이면 좋겠다. 저예산으로 한 디자인이라도 그저 그런 것이 아닌, 저렴해도 기본적인 것은 지켜진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의 상향 평준화를 원한다. 디자이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타이틀을 쓰며 디자이너는 박봉이니 야근이 많다느니 소리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시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신만의 디자인 기준이 생기면 무엇보다 행복한 직업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작게, 조금씩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며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이태원의 부동산을 보며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 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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