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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Jun 06. 2021

적성과 능력은 모르겠고요. 그냥 하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무언가가 되기 위해 분투중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런 책을 읽었다. (출처 : 예스24, 똑똑한 직업학교 시리즈)

 “너는 생계를 떠나서,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하고 싶은 그런 게 있냐?” ‘아이고 아버지. 밥 먹을 때 꼭 그런 걸

 물어보셔야 하나요.’ 왠지 없다고 하면 100% 혼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딱히 몰두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한심하다며 한 말씀하신 뒤로는 다시 질문하시지 않으셨다. 초등학생 때 직업의 세계를 다룬 책을 읽고 과학자나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가 혼이 난 뒤로는 속마음을 밝히지 않게 되었다. 전적으로 아동출판사의 잘못이 크다. 이왕이면 ‘초등생 부모님이 좋아하는 직업 100선’ 같은 콘셉트의 책을 냈어야지. 아무거나 골라도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직업을 담아서. 예를 들면 한국은행 총재 같은.



  CJ 햇반보다 오뚜기밥을 골라 담는 지금보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은 줄곧 비만아동이었다. 정말이지 잘 먹고 잘 자랐다. 외할머니 댁에서의 나는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였다. 식간에는 삼촌과 바닥에 누워 TV를 보면서 과자를 먹었다. 밥때가 되면 한상 가득 흰쌀밥에 계란말이에 맛난 반찬을 들고 오셨다. 어린 시절부터 맛을 음미하는 행복을 톡톡히 느끼고 자란 탓에 요리사는 꽤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가 혼내시지 않았더라면 ‘승우 아빠’는 못 되어도 이름 걸고 활동하는 요리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주방 뒷문 옆에서 쪼그리고 담배를 피우는 보조가 되었을까. 지금의 나는 계란 프라이 정도는 만들 줄 안다. 반찬은 사 먹는다.



뒤늦게 하루 12시간씩 공부했음에도 담임 선생님마저 포기한 나는 수포자다. 그것도 수2는 고사하고 수1을 망쳐서 대학교는 ‘언·외·사’ 전형을 골라서 겨우 들어갔다. 생물, 화학은 쳐다보기도 싫었으면서 어릴 적에는 과학자를 꿈꿨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일반인보다 월등히 운동신경이 좋은 프로선수들이 인기를 얻듯이 내게는 이과 계통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를테면 동굴에 갇혀서 용접기만 갖고도 아이언맨을 뚝딱 만드는 토니 스타크는 굉장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영화이지만. 종이에 적힌 글이나 사상 같은 무형의 것이 아닌 실물을 만들어내는 재주는 매혹적이다. 대체로 공업이라 부르는 일들인데, 생산하는 모든 이들은 멋있다.



Source :  סרט נע, סרט רע  Author :  אנונימוס לזכויות בעלי-חיים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에 비하면 이렇다 할 재주 없이 감별사의 손에 붙잡혀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병아리처럼 사는 나의 인생은 멋이 없다. 사람들은 으레 신입사원 시절 입사 경쟁률을 기억한다. 200대 1, 300대 1을 뚫고 취업에 성공한 무용담을 갖고 있다. 그렇게 병아리 시절을 거쳐 닭이 된다. 매일 달걀을 낳지만 보람이나 성취감을 느끼지는 못하는 노동자가 된다. 암탉에게는 알 낳는 적성을 따지지 않는다. 축산물 품질평가원에 의하면 닭이라고 해서 365일 동안 매일 알을 낳지는 못한다.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나름의 휴란기가 있다. 1년에 보통 평균적으로 200개에서 250개의 알을 낳는다. 보통 직장인의 근무일은 1년 중에 주말을 빼면 약 260일 정도 된다.



마트 계산대(출처 : pxhere, CC0 Public Domain)

 채식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알 낳기의 기쁨과 슬픔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예라 말하면 자기 비하가 심한가. TV 프로그램 무한도전 ‘관상특집’ 에피소드 중에 방송인 노홍철이 조선시대 말투로 길 가는 시민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회사원이라고 답하자 계급으로 치면 천민이냐, 양반이냐고 묻는다. 시민은 ‘노비요.’라고 답해 노홍철을 놀라게 한다. 나도 노비다. 좀 더 직업의식을 갖고 대답하면 ‘캐셔’다. 출납원을 비하하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본받는다. 어떤 물건이 닥치든지 포스기로 ‘삑’ 찍고 계산할 뿐이다. 일하는 사람의 자세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만 시키면 불평하는 회사원보다 훨씬 낫다.



 자신을 노비로 인식하는 삶의 태도는 문제 될 게 없다. 현대는 아직도 계급사회다. 사람은 누구나 자본가와 비자본가로 나뉜다. 회사 안에서는 직급으로 계급에 차등을 둔다. 계급보다 중요한 건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다. 절대로 닮지 않고 싶은 선배나 높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싶다. 역사 속 폐급 탐관오리를 동경하는 사람이 있을까. 당대에 팔자가 피었을지언정 대대로 욕먹는 인물이 되고 싶은지의 문제이니까. 혼천의, 물시계 자격루, 해시계 양부일구, 측우기를 만든 장영실이 노비 출신이란 사실을 종종 잊는다.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위대한 노비다. 빈농의 아들로 출세한 개츠비도 멋지고, 신분 상승한 관노 출신 장영실도 무척이나 빛이 난다.

장영실 초상(좌), 위대한 개츠비 영화 포스터(우)

 요즘 많은 회사원들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노비 탈출을 꿈꾼다. 직장에서의 레벨업을 노린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한다. 코인으로 인생역전을 꿈꾼다. 아니면 부업을 한다. 유튜브, 구글 애드센스, 네이버 파워블로거, 쿠팡 파트너스, 아마존 셀러, 출판 계약, 전자책, 이모티콘,  에어비앤비로 부수입을 노린다. 공부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클래스 101, 패스트캠퍼스, 퍼블리, 스터디 파이, 스타트업 독서모임 등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배운다. 뜻이 있는 사람은 대학원, 로스쿨을 준비하느라 주말에 데이트도 못 한다. 내 경우는 단순히 애인이 없어서 데이트할 일이 없다. 다만 주중과 주말 구분 없이 배움에 몰두하는 셀러던트인 건 맞다.



주말인데 공부만 하고 있어야 하다니..(cottonbro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입사 후 2~3년 차 때부터 회사 몰래 이중생활을 지속해오고 있다. 겸직 금지 조항에 걸리지 않나 하는 고민도 많이 해봤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중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익이 나야 소득신고를 하거나 인사팀에 실토라도 할 텐데. 웃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배움은 어떻게든 플러스 흐름으로 되돌아온다고 믿는다. 퇴근 후 유튜버를 꿈꾸면서 활동하다 망한 경험은 현생에서 회사 유튜브를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더라. 작품 1개 내고 은퇴한 귀멸의 칼날 만화가처럼 대박을 꿈꾸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책은 아직 안 나왔지만, 회사 보도자료 작성과 스피치 라이팅에 도움이 되었다.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모든 일들은 실력에 비례해서 언젠가 어떻게든 인생에 도움이 된다. 이 중에 하나는 터지겠지 하는 심정으로 여전히 주중과 주말이 뒤섞여서 혼탁한 삶을 산다. 항상 무언가를 한다. 회사일이든 집에서 부리는 수작이든. 어딘가에 몰두해있다. 밤에 잠을 청할 때도 장거리 비행 중에 쪽잠을 자는 기분이다. 지난번에는 건강검진 예약차 온라인 문진표를 작성했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데 ‘흡연 중’이라고 체크했다. 하루 반 갑을 피운다고 예언하고 다시 피우니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몸의 긴장을 풀어줘야 1년에 200개에서 250개 이상 알을 낳을 수 있다. 훌륭한 닭으로 남든지, 닭장을 탈출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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