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봐도 이불킥 감인 편지를 공개합니다
서점에 책이 풀리던 첫 주, 아직 부모님은 출간 소식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멀쩡한 아들이 회사 끝나고 배낭에 서류파일을 잔뜩 넣고 서점을 돌아다닐 줄은 꿈에도 모르셨지요. 배낭 속 파일에 들어있는 서류는 가정용 프린터로 손수 인쇄해서 명함과 함께 클립을 끼워 가지런히 정리한 저의 편지입니다. 손글씨 폰트를 사용해서 언뜻 보면 꾹꾹 눌러쓴 것처럼 보이는 이 편지는 서점 직원에게 바치는 저의 마음입니다. 음흉한 욕망을 예의바름으로 감춘 속내라고나 할까요?
출간 6일 차에 준비한 서한에 뭐 그리 자랑할 거리가 있을까요. 아직은 이렇다 할 독자 리뷰도 없는 상태입니다. 책이 나오자마자 서평단을 모집하고 초조하게 리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1주 차 신생아 도서를 소개하는 미미한 편지 한 장, 출판사에서 만든 보도자료 한 부, 그 위에 명함을 클립으로 집어서 파일에 넣습니다. 편지는 격식을 차리기 위해 봉투에 넣었습니다. 두 달 동안 많이도 바뀌었지만 처음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ㅇㅇ문고 ㅇㅇ점 담당자님. :)
저는 이번에 동양북스 출판사와 함께 신간 <같이 있고 싶다가도 혼자 있고 싶어>를 펴낸 내성적인 지은이 심정우라고 합니다.
이번에 저의 첫 책이 나와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서가 어딘가에 꽂혀있을 작고 작은 저의 책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프렌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을 넘어 2021년은 물론 2022년에도 프레스티지 등급을 예약한 책 덕후 심정우 드림(평소에 ㅇㅇ점, ㅇㅇ점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시 봐도 눈을 씻고 싶을 정도로 창피합니다. 무엇보다도 담담하고 담백한 척 짧게 줄이려다가 마지막에 4줄이나 덧붙인 자기 PR 멘트가 부끄럽습니다. 저자 소개 편지인데 본인이 누구인지, 책이 어떤 내용인지, 독자 반응이 어떤지는 한 줄도 없이 평소에 여기 서점에서 책 많이 사는 고객임을 어필하는 치졸함이 매우 돋보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첫 번째 영업을 준비하던 이 때로 시간을 되돌려서 편지 내용에 앞서 강조한 세 가지를 꼭 추가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사족은 싹 지우고요. 다행히 이다음 버전부터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초보 저자 정어리의 조언 ③
서점 영업용 편지를 준비할 때 들어가야 하는 3가지 : 저자 소개, 책 소개, 독자 반응(★-좋은 피드백은 차곡차곡 모아서 편지 내용에 업데이트합니다.)
※ 저자로 서점을 찾아간 거라면 저자로서의 본인을 소개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평소 구매 실적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모습은 어쩐지 꼴불견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제 책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서점의 우수 고객입니다. (어쩔티비?)
다른 저자들은 이렇게 종이에 편지를 인쇄해서 파일에 끼워서 봉투까지 준비하여 영업을 다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님은 제외합니다. 많은 방법 중에 편지를 준비한 이유는 저에게 허락된 시간은 적은 반면, 서점 직원 분들은 너무나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실전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인사를 후다닥 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직원 분들의 마음은 급하기 때문이죠.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정식으로 약속을 잡기에도 민망했으니까요.
히트 앤 런(Hit and Run), 뼛속까지 내향인인 저는 직원에게 편지를 건넬 때부터 빨리 작별인사를 하고 도망갈 생각을 합니다. 겉으로는 사회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저는 사무직이지 영업직이 아닌걸요. 서점 직원에게 접근할 때 굳이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 내밀었던 점은 후회스럽습니다. 한 번은 도서 추천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서서 공손히 설명을 드리면서 두 손으로 파일을 내밀었던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제 편지를 받은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안에 든게 뭐죠? 상품권 같은 건가요?"
영화에서 보면 적대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주인공이 다가갈 때 멀리 떨어져서 칼을 내려놓고 양손을 든 상태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영업용 편지도 굳이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로는 봉투를 빼버리고 파일에 바로 편지 내용이 보이게끔 종이를 끼워서 손가락으로 글을 가리키며 편지라고 처음부터 설명해주었습니다.
A4 용지에 인쇄하든 손바닥 만한 엽서에 짧게 쓰든 중요한 건 진정성과 핵심 포인트입니다. 바쁜 하루 일과 중에 저라는 사람을 만나고 뭐라도 기억에 남으려면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편지를 쓰고 명함을 제작했습니다. 제 책을 주문하면 어떤 점이 서점에 득이 될지도 나름의 논리로 전달해야 하지요. 어느새 영업사원이 되어가는 초보 저자였습니다.
초보 저자 정어리의 조언 ④
서점 직원분한테 편지를 건넬 때는 차라리 봉투를 빼고 내용물이 보이게 드리는 편이 낫습니다. 봉투 안에 돈 아니면 상품권이 들어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