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푸른 대문 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나
사람들은 가는 사람보다 오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유성이 나간 후 한동안 강단과 윤태만 드나들던 청월하숙 대문을 웬 여자가 열고 나왔을 때 복순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여자는 보통처럼 보이도록 노력하는 보통 언저리의 사람 같았다. 머리는 최대한 뒤로 질끈 묶었으나 튀어나온 옆머리가 꼬불거리는 게 곱슬이 틀림없었고, 무엇보다 아주 짧았다. 복순의 손으로 기껏해야 한 뼘 반 정 도의 머리를 땋아 내렸다. 옷차림은 또 어떠한가. 아무리 날이 더워지고 있다 해도 팔뚝이 보일 정도로 팔소매를 걷어붙인 것은 물론이요, 치마까지 무릎을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로 짧았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계집애가 조신치 못하게 다리를 보이고 돌아다녀”라고 한소리 던지기 어려웠던 것은 치마 밑에 바지를 받쳐 입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처음 보는 괴상한 옷차림을 한 선휘는 복순보다도 당황한 눈빛으로 허둥거렸다.
“미안, 너무 갑자기 열렸지?”
복순은 문이 열렸다는 사실보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 때문에 놀랐다고 말해 주었다.
“아, 어제부터 하숙에서 일하게 됐어. 지낼 곳이 없었는데 여기 아주머니께서 다행히 사정을 알아주셔서.”
복순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웃는 얼굴을 관찰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고 비뚤어진 사람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청월하숙에 어울린다. 다만 조금 허둥거리고 어딘가 불안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단은 왜 이런 사람의 사정을 살피고 알아준 걸까. 비밀을 파헤치는 암행어사가 된 기분에 복순은 갑자기 책임감을 느꼈다. 처음 꺼내는 한 마디가 중요하다.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복순은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목을 위로 길쭉하게 뻗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한 법이다.
“나는 남선휘야. 이름이 뭐니?”
“복순이.”
복순은 이날 선휘와의 만남을 계기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먼저 이름을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선휘는 여러 면에서 청월하숙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을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그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고고하게 홀로 떨어져 있었던 청월하숙과 남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선휘라는 다리가 하나 놓인 것이 복순은 아니 꼬웠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이점은 있었다.
“그 살고 있는 곳 말이야, 사실 소문이 좋지는 않어.”
“청월하숙이요? 하숙집 소문이 안 좋을 게 뭐 있다구.”
“왜, 명색이 하숙집인데 학생도 하나고....... 거기 살던 강단이라는 여자도 여기 평생 살았으면서 사람들이랑 도통 말을 트려 하질 않그든. 애초에 잘 안 보이는 사람이기도 하구. 그나마 윤태가 싹싹하니 착하니까 사람들이 쉬쉬 하는 거지.”
특이하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시간이 있었다. 장터를 다녀온 사람, 잠시 빨래를 널러 나온 사람, 두런거리는 소리에 궁금해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모이면 꼭 대화가 저런 주제로 흘러 갔다. 복순이 가끔 끼어들어 반박하려 해도 어린아이는 다른 데서 놀라는 타박만 돌아왔다. 먼저 그곳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사람은 복순이었는데도 늘 그랬다. 복순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하루가 지루해서 못 배기는 사람들이라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들이라는 건 아니야. 지친 것뿐이다.”어떤 밤의 어머니는 어린 복순을 무릎 위에 앉히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선휘는 늘 그런 무리 안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는 그 또한 뒷이야기를 즐기는 군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나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보통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라며 거들거나, ‘그러고 보니 그건 아세요?’ 같은 질문을 던져 화제에 불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선휘는 달랐다. ‘그런데 강단 아주머니랑 친해지고 싶으세요?’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악의 없는 표정으로 던져 대화의 물꼬를 막아버리거나, ‘하숙이 조용하니 윤태가 공부를 열심히 잘하더라구요. 윤태도 교사가 될지도 몰라요.’처럼 답변을 미묘하게 틀어서 아예 화제를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를 끼운 대화는 반드시 뒷담이 아닌 수다로 끝났다. 게다가 선휘와 있으면 반드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그런 일이 있었다. 땅바닥에 앉아 청월하숙의 푸른 대문 틈 사이로 마당을 들여다보는 선휘를 마주친 것이다. 맨 아래에 짙은 푸른빛이 남은 새카만 하늘은 별이 수놓은 지 오래였 다. 평소보다 땅따먹기가 길어진 하루였다. 복순은 집에 들어가면 혼이 날 것을 각오하고 골목으로 들어오다 대문에 빨려 들어갈 듯 얼굴을 파묻은 선휘를 발견했다.
“언니 집인데 왜 앞에 숨어 있어?”
“쉿! 복순아, 너도 여기 와서 수그려. 안 보이게.”
“왜 그러는데.”
선휘는 복순이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부른 것 같았다. 복순이 무슨 일인지 묻자 눈을 질끈 감고 쉿쉿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기분이 상한 복순이 소리 지를 것처럼 손나팔을 만들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나서야 선휘는 복순의 입을 막으며 다급히 속삭였다.
“그림자가 지나갔단 말이야, 그림자가.”
“그, 그림자? 귀신 아니야?”
“귀신이 세상에 어디 있어. 죽으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러니까 저건 사람이야.”
복순은 선휘를 따라 대문의 틈에 코를 박았다. 길쭉한 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청월하숙이 보였다. 복순은 속으로 아주 떨면서도 귀신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그때 그는 보았다. 청월하숙의 지붕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지붕을 손끝으로 훑으며 돌고 있었다. 지붕을 두 바퀴나 돌고 난 후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성큼성큼 걷다 박차고 뛰어오르는데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래를 보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림자를 좇는 선휘가 보였다.
“언니, 도둑이면 어떡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도둑은 아니야.”
“어떻게 알아.”
“가져간 게 없어.”
“하지만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선휘는 눈썹을 찡그리며 낮게 ‘으으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표현할지, 솔직하게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는 아무것도 없는 지붕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선휘는 입을 열었다.
“내 집이니까.”
자, 모두 모여 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해. 자기들 이야기가 퍼졌다는 사실을 알면 제일 먼저 우리를 찾아올 테니까. 다들 도깨비 이야기는 알지? 왜, 인간들이 하는 짓 재미있어서 가끔 이 마을 저 마을 다닌다잖아. 가짜 아니냐고? 내가 증명해 줄게. 음....... 항상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 있잖아.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봤는데 방을 뒤집고 다녀도 안 보일 때. 그거 도깨비가 너한테 장난친 거야. 도깨비들은 항상 심심하거든. 그래서 눈을 감고 엎드린 다음에 도깨비님, 더 이상 못 찾겠어요! 이제 돌려주세요! 하고 외친 다음에 고개를 들면 죽어도 안 보이던 그 물건이 바로 보인다는 거지. 아, 그래도 그런 시시한 장난만 치는 분들은 아니고...... 가끔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은 콱 죽여버린다더라.
아무튼 도깨비들 사이에도 두목이 있는데, 도깨비 장군이라고 부른대. 그 장군이 오백년에 한 번 지루해져서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는데, 이번에는 우리 마을에 왔대.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나는 지금 이 대회가 중요한 게 아니야. 꼴등 해도 하나도 상관 없단 말이야.
너희 최근에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월요일만 되면 장터에서 술 퍼 마시고 돌아와서 주정 부리던 술꾼 할배 알지? 왜, 아득바득 모은 돈으로 탁주를 사서 물처럼 마시는 미친 할배. 그 할배가 저번주에도, 이번주에도 안 보였어. 분명 도깨비 장군이 데려간 거야.
나는 똑똑히 봤어. 우리 마을 들어오는 입구에 담벼락 있지. 왜, 솟대 서 있는 쪽에 있는 낮은 담. 잡초 막 솟아 있고. 너희 그 이야기도 알지. 도깨비돌 이야기. 다섯 번 두드리면 도깨비인지 귀신인지가 잡아간다고 했던 돌. 내가 그 돌이 진짜로 있는지 궁금해서 우리 마을에 있는 담이란 담은 다 뒤지고 다녔거든. 그런 데 그 담벼락 뒤에 진짜로 있었어. 잡초에 가려져서 못 본 거라고. 이만한 푸른 점이 찍힌 돌이 있었거든? 다 칠해진 푸른색은 아니래도 푸른색이나 푸른 점이나 비슷하잖아.
그런데 그 할배가 그 돌을 아예 뽑아버렸어. 뽑고 자기 혼자 크게 웃더니 뻥 뚫린 구멍 안에 손을 쑥 집어넣더라니까. 나 정말 소리 지를 뻔했는데 참았다. 도깨비돌이잖아! 저기 하숙 사는 형 알 지. 중앙고보 다니는 형. 나 그 형이랑 조금 친하거든. 아무튼 그 형한테 이야기했더니 나한테 다 말해줬어. 도깨비들은 우리 눈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아끼는데, 꼭 귀하게 여기는 물건에 는 자기만의 표시를 한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런 돌 발견하면 절대 만지지 말고 그대로 자리에 놔두라고. 생각해 보면 난데없이 담벼락 돌에 푸른 점이 찍힐 이유가 뭐가 있겠어. 도깨비돌인 거라니까. 그런 돌을 그 미친 할배가 뽑아버렸다고.
솔직히 나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 아무리 무서워도 전설은 전설이니까. 그런데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 할배가 도깨비 산으로 들어가는 거. 그 산, 을씨년스러워서 사람들이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는 곳이잖아. 우리들은 도깨비 나온다고 해서 발도 안 들이고. 그런데 심부름 가려고 나왔는데 뭐가 부시럭거리는 거 야. 그쪽을 쳐다봤는데 할배가 도깨비산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거야. 그리고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 나도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야. 나랑 갑자기 눈이 마주쳤는데 피하지도 않고 이글이글 쳐다봤다고. 눈에서 불이 났다니까. 그리고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거야. 홀린 것처럼 노래까지 부르면서!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당연히 튀었지! 무서워서 그대로 도망갔어. 처음에는 뒤돌아 보고 싶지도 않더라, 도깨비든 할배든 무언가 쫓아올까봐.계속그렇게 뛰다가 아무 소리도 안 나서 천천히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산속으로 사라진 거야, 틀림없어. 그대로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렸어. 아, 진짜 무서워. 그 뒤로 그 할배 다시는 안 나타났어. 도깨비 장군이 홀려서 도깨비산으로 데려간 거야. 죽이고 잡아먹은 거라고. 어떻게 장군이 그런 건지 아냐고? 내가 그 할배가 노래하는 걸 직접 들었으니까.
장군이다, 장군이다! 장군이요, 장군이로다!
“맹꽁이, 뭐 해.”
“학생 이윤태다.”
윤태는 학생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본인도 인정했지만 그것보다도 ‘학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좋다고 말했다. 복순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게였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밝았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공부가 좋아?”
“그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잖니. 복순이도 열심히 공부해서 많이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치, 해서 뭐 해. 나는 공부로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꼭 먹고 살려고 공부를 하는 건 아니야.”
“그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지.”
“아는 거랑 빼앗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아는 게 없으니 볼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코앞에서 빼앗기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하나도 안 빼앗겼는걸. 그리고 빼앗는 놈들이 나쁜 거 아니야?”
“네 말이 옳다, 복순아. 빼앗는 놈들이 나쁘지. 그래도 이런 이야기는 나랑만 하는 거다. 어른들한테 하면 도깨비 장군이 버릇없 다고 이노옴 하고 쫓아온다.”
“진짜로 도깨비 장군이 있어?”
“그럼.”
“학생 걸고?”
“학생 걸고.”
복순은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곧바로 뒷간에 갔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절대로 볼일을 보러 가지 않았다. 새벽에 눈이 뜨여 어쩔 수 없이 그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할 때면 정말이지 끔찍했다. 아무리 어른들이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 해도 아직 복순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이 훨씬 더 무서웠다. 사람에게 당하면 차고 때릴 수라도 있지, 귀신에게는 잔뜩 얻어맞다가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러나 비가 오거나 구름이 잔뜩 낀 날에는 노을이 언제 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습한 날은 특히 최악이었다. 하늘은 종일 어두운 데다 바닥까지 질척거려서 뒷간이 아침에도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었다. 결국 아침에 눈을 뜨고 하늘이 까맣게 물들 때까지 뒷간을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복순은 아주 빠르게 볼일을 끝내리라 굳게 마음먹고 신발을 신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젖은 흙바닥이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복순은 마당을 가로질러 뒷간으로 들어가 웅크려 앉았다.
어딘가에서 낮은 대화소리가 흘러왔다. 두런두런거리는 것이 도깨비가 틀림없었다. 대회 때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잡으러 온 것이다. 복순은 눈을 질끈 감고 누군가 어깨 를 덥석 잡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용한 말소리만 계속될 뿐이 었다. 이렇게 죽을 바에는 도깨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나 듣고 죽자는 오기가 생겼다. 귀를 기울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해 무어라 말하는지 정확하지 않았으나 윤태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누군가의 기침 소리도 들렸다. 복순은 참았던 숨을 후 내뱉었다. 역시 도깨비가 겨우 뒷간에 숨을 리 없었다.
복순은 강단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려웠다. 복순을 동생처럼 아끼는 윤태나 복순에게 말을 걸지 못해서 안달인 선휘와는 달리 강단 은 늘 눈인사가 다였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걸어 볼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학교에서 막 돌아오는 유성을 붙잡고 과학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남은 호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강아지가 좋아하는 사람을 따르듯 복순도 강단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싶었 다. 그러나 강단은 청월하숙의 주인이면서 하숙에서 제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푸른 대문만큼이나 꽉 닫힌 사람. 복순은 언제나 강단의 편이었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 수군거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궁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강단은 모두에게 공평한 거리감을 두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는 아무도 대화를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가끔은 그가 장을 보고 하숙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다. 늘 무미건조한 인사에 땅바닥을 쳐다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복순이었지만 언젠가부터는 고개를 들어 그 눈동자를 쳐다보기 시 작했다.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단은 복순과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는 그를 쳐다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단의 눈동자는 타다 만 재처럼 새카맣다. 타다 말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의 눈이 늘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먼 곳 을 쳐다보는 눈동자는 어딘가 끝에 존재하는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곧은 눈을 보고 있으면 아무런 희망도 의지도 없이 살아가는 자조차도 마음 한 구석이 잘게 떨려왔다. 하지만 그게 강단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강단을 잘 모르는 자들은 말수가 적다며 그를 어려워했지만, 복순은 그 눈동자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다.
그런 강단과 가장 길게 대화를 나눈 날을 기억한다. 복순은 집에서 나왔을 때 담벼락 밑에 자란 꽃 한 송이를 내려다보는 강단의 등을 보았다. 멈추어 있는 강단은 처음이었기에 복순은 홀린 듯 뒤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보니 자주색이 아주 연하게 섞인 푸 른 꽃이었다. 흔히 보이는 잡초치고 꽃의 색과 모양이 예쁜 편이라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할 때 자주 쓰는 들꽃이었다. 복순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이 꽃은 이름이 뭘까.”
돌아보지도 않고 강단이 중얼거렸다. 복순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혼잣말인지, 뒤에 서 있는 자신에게 한 말인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복순은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떼었다.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피더니 이제는 매일 보이는 꽃이에요.”
강단은 꽃만 살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복순이 왔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복순은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이 꽃이 좋으세요?”
“누구 생각이 나서.”
“그게 누군데요?”
“말해 줘도 모른다. 지금은 저승에서 신선놀음 하고 있을 사람이라.”
복순은 부드럽고 매끈거리는 꽃잎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여러 송이가 뭉쳐서 핀 모습이 예뻤다. 복순은 재미가 붙어 얇은 꽃잎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굴렸다. 실수로 힘을 세게 주는 바람에 꽃잎 하나가 툭 뜯기고 말았다. 강단이 볼 새라 주먹을 쥐어 홀로 떨어진 꽃잎을 숨겼다. 쭈뼛거리며 괜히 줄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는 복순의 머리 위에 따뜻한 무게가 얹혔다.
“꺾지는 마라. 아직 더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작은 잔에 꽂아두면 예쁠 것 같은데.......”
“선휘가 이 꽃을 아주 아끼거든.”
“선휘 언니가 꽃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이 꽃만 좋아한다.”
그 말을 끝으로 강단은 조용했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등지고 선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복순은 그의 옆에서 잔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꽃을 관찰할 뿐이었다. 이 꽃은 봄에도 겨울에도 많이 피어요. 친구들이랑 소꿉놀이 할 때도 점 칠 때도 자주 써요. 꽃잎을 나뭇가지로 빻으면 푸른 물이 나와요.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이 복순의 입가를 맴돌았다.
그날 못다 한 말들은 선휘에게 하게 되었다. 선휘는 아침에 꽃을 발견하자마자 잎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반가워했다. 복순이 늘어놓는 푸른 꽃에 대한 지식들을 들으며 선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듯 되뇌었다. 그리고 복순이 몰랐던 것도 알려 주었다.
“이 꽃, 만주에도 피는 거 알아?”
“만주가 어딘데?”
“엄청 추운 곳 있어. 어어어엄청 추운 곳.”
“언니는 어떻게 아는데?”
“누가 알려줬지.”
“누가?”
“말해줘도 모를 텐데. 좀 멀리 갔거든.”
“언제 돌아오는데? 여기로 와?”
“그래도 아득바득 피네. 여기까지 나 따라온 것 좀 봐.”
며칠 뒤 아침 복순이 밖으로 나왔을 때 꽃은 사라져 있었다. 그 꽃이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었지만 강단이 내심 실망할 것이 신경 쓰였다. 그때 선휘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복순과 눈이 마주친 선휘는 꽃의 빈자리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