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리 Aug 31. 2021

잠의 자장가 / 이루시엔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리

  고등학교 때 친구 중 누군가가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냐’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하루하루 다가오는 수능과 학교 시험과 참고서에 찌들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법도 하지만, 1초도 안돼 냉큼 “잠자기 전 이불 덮었을 때!”라고 외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행복함은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명장면에는 항상 ‘소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음악이든 아니면 크거나 잔잔한 효과음이든 어떤 장면에서의 감정을 극대화해주는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잠자기 전 이불을 덮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도 소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듣고 있는 바람 불어오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 잡다한 소리가 섞인 도시 소리가 제 행복한 순간을 더욱 키워줍니다.


  휴일 낮에 간만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 창밖으로 맑은 하늘이 보이면 창문을 스르륵 열어봅니다. 창틀 사이로 바람 소리와 멀리서 옅게 들려오는 매미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방 불은 꺼 놓은 채로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이불을 가슴까지 덮습니다. 방에는 하얀색 발에 한번 투과된 부드러운 햇빛만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얼굴 위로 스치는 바람과 함께 무언가 창틀을 넘고 있구나 싶은 바람 소리가 귀에 담깁니다. 7할의 바람 소리와 2할의 새소리, 1할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이면 눈은 스르르 감깁니다. 달콤한 낮잠의 소리가 됩니다. 귀에 들어오던 낮잠 소리는 점점 어슴푸레해집니다.


  이젠 밤으로 가보겠습니다. 열대야가 살짝은 잦아든 8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는 밤잠의 소리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창문을 열면 더위 사이로 시원함을 안겨다 주는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귀뚜라미인지 아니면 다른 벌레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풀벌레 우는 소리가 화음을 이룹니다. 사람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풀벌레들이 가득 찬 모양입니다. 여름철 땡볕에서 죽어라 울어대는 매미 소리라면 밤잠을 설치게 할지 몰라도 풀벌레 소리는 절대 잠을 방해하는 데시벨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또 도시인지라, 간혹 자동차가 매끄럽게 미끄러져 가는 소리도 들립니다. 이 소리를 들으며 꽤 시원해진 바람을 느끼다보면 금새 잠에 빠져듭니다. 다음날의 시름이 있을지언정 그 순간만은 평화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이런 소리를 귀에 담으며 잠에 들다보면 머릿속을 맴돌던 근심과 걱정을 단숨에 사라집니다. 온전히 나와 잠 그리고 여러 소리로 이루어진 자장가만 남습니다. 엄마 뱃속에 있던 때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30년 전에 들었던 여러 소리가 익숙한 잠의 소리가 된 듯싶습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생각은 안 나지만 다섯 살 이후 기억부터는 종종 또렷합니다. 그때 잤던 낮잠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할머니와 엄마가 칭얼거리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거실에 요를 깔아두고 배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면 아이는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했습니다. 잠들었다고 믿고 어른들이 자리를 뜨면 아이는 눈을 감은 채 바람 소리와 아파트에서 나는 잡다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문을 열고 잔 적이 많은지라 바람과 도시 소리는 잠들기 전에 항상 마주하는 벗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습관과 기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행복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에서는 “사람이 일평생 유년의 기억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그리움에 젖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으로만 보면 불행일 것이고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또한 행복일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매일 행복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증의 쳇바퀴 / 이루시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