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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Oct 15. 2021

소중한 물건 / 철수

내 애장품을 소개합니다

  학교 기숙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호실배정이 랜덤이었는데, 덕분에 학기가 끝날 때마다 덜컹거리는 캐리어에 냉장고와 모니터를 싣고 이 기숙사에서 저 기숙사로 수도 없이 이사를 해야 했다. 여름은 더워도 다닐 만했으나 한 겨울에 살짝 얼어붙은 도로를 통해 캠퍼스를 가로지를 때면 꽤 짜증이 났다. 학교로 오는 용달은 내가 예약하려고 보면 이미 근면성실한 친구들이 예약을 다 해버려서 남는 차가 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학생회에서 제공하는 용달차는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선 또다른 성실남녀들의 차지였다. 남는 용달차들은 얇은 학생 지갑으로 부르기엔 너무 비싼 차들 뿐이었다.


  매학기마다 이사는 이어졌다. 몇 학기를 제외하고는 매번 새로운 호실에서 지냈고 무려 6년 동안 학교에 있었으므로 대학생 때만 10번을 넘게 이사를 치렀다. 그리고 매 번의 이사 때마다 작건 크건 짐을 덜어냈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건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어릴 때는 물건 하나하나가 너무 비싸게만 보였다. 이사 직전에 옷을 다 펼쳐놓고 온갖 이유로 옷을 안 버려야 한다고 합리화했다. 그러나 첫 학기에 버리지 않았던 골지나시티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입은적이 없었고 몇 학기 지나지 않아 의류함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짐 정리는 점점 쉬워졌다. 


  짐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힘들지만 또 반가운 일이 되었다. 반년마다 물건을 정리하다 보니 버리는 물건도 잃어버리는 물건도 많았다. 끊임없이 물건을 사고 팔고 또 버렸다. 선물 받은 물건들은 조금 더 아꼈지만 그래도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은 닳고 꽃은 시들고 머그잔이나 도자기는 이사 몇번만에 깨져버렸다. 시간이 지나서 남는 것은 사진과 편지였다. 온갖 물건을 분리수거하고 마지막으로 그 둘을 정리하면서 마음도 정리하고는 했다. 짐정리는 짧지만 공간에 머물렀던 시간에 대한 마무리로서 기능했다.


  짐 정리가 반복되면서 때로는 소중했던 물건도 시간이 지나면서 전처럼 소중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물건의 가격표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물건에 부여하는 의미가 중요한 거였다. 낡은 디젤 청바지가 소중한 건 그때 몇달이고 아껴서 샀던 비싼 청바지여서가 아니라 그 청바지를 입고 어린 시절 많은 여행을 다니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이삿짐을 정리해야되는 시간이 돌아왔다. 가져갈 물건을 꼽다보니 여전히 가져가야할 만한 물건은 기숙사를 오가며 이사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건의 숫자는 많이 늘었지만 실은 버리려면 바로 버릴 수 있을 물건들이었다. 소중해진 물건들만큼 이제는 버려도 될 물건들이 늘었다. 한 박스안에 다 들어갈 그 부피를 생각하면 홀가분하면서 헛헛했다. 다음 번엔 한 박스보다는 많이 남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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