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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Oct 24. 2022

개로 길러진 아이9

아동학대 소설

현실을 도피할 때는 게임이 제일이다. 서준은 조 지점장에게 모욕적으로 쫓겨난 뒤 며칠 간 컵라면과 신라면과 비빔면과 짜왕의 수혜를 입었다. 게임을 하다 질리면 유튜브를 보며 킬킬대고, SNS에서 사람들의 주장과 싸움들을 구경하고, 추천 게임 컨텐츠를 보고, 설치하거나 가입하기는 귀찮으니 요약해주는 영상을 보고, 그렇게 쉴새없이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를 집어넣으면 뇌는 기뻐한다. 그리고 바쁘다보니 최근 기억 회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일주일이 조금 넘은 다음 싱크대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서 정리를 좀 했다. 라면의 잔해를 둘러싸고 검은 벌레들이 어린 태를 벗고 성충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충 정리하고 현관 앞에 가득 쌓인 골판지 박스들도 정리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회사를 나오면서 들고온 상자는 그대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위는 더부룩하고, 얼룩덜룩한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의 눈빛은 썩어 있었다. 마음은 평온했다. 예전부터 인스턴트가 좋았다. 그 여자가 내 준 음식은 안전하지 않았으니까.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에 몇 번 그러다가 아무래도 뒤탈이 있겠다, 위험하다 싶었는지 그만두었다. 어리고 아무것도 모를 때 서준을 제거해 버리고 싶었나보다. 내어 준 반찬에서 세제 냄새가 났다. 엄마, 이거 이상해. 그러자 엄마는 정말? 이라면서 믿기지 않을 사실을 확인하지도, ‘아이고 어떡하냐’ 하는, 면식 없는 동네 꼬마에게도 할 만한 가식적인 걱정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서준이 가리킨 반찬을 싱크대에 버렸다.


당시에는 그 장면의 위화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요리를 하다 보면 세제물이 실수로 약간 들어갈 수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엄마가 아무 표정도 없이 일상적으로 대처한 게 아닐까,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그러나 주변에 물어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아이는 없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 그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 지가 확실해졌다. 성인이 요리를 하면서 아무리 산만하게 군다고 해도, 세제가 들어갈 일은 없다. 그리고 어머니는 산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한 번 더 있었다. 이번에는 바퀴벌레였다. 생명을 빼앗으려고 한 건 아니고, 괴롭히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바퀴벌레의 유해성은 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일절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놀랍게도 서준이 내민 그릇 안을 확인하지도 않고 싱크대에 버렸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따져 물었어야 했다. 왜 확인하지 않지? 현대문명사회에서, 아파트에서, 캠핑을 간 것이 아닌 이상, 방금 밥솥에서 퍼낸 밥그릇 안에 벌레가 몇 분 만에 들어가는 건 확률적으로 꽤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그것이 의도된 바가 아니었다면, 벌레를 넣은 것이 본인이 아니었다면 확인을 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 이야기들을 나중에 학교 동급생들에게 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어머니의 행동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다는 그 자체를 믿지 못했다. 그리고 오히려 서준은 거짓말쟁이, 자기 엄마를 이상한 사람으로 각색하는 아이로 해석되었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 서준은 어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야기했으면 글쎄, 달라졌을까? 어른들의 반응이 아이들보다 더 격렬하게 비난조였을까?


그리고 나서는 아마 사용량을 줄였던 것 같다. 서준은 종종 음식 맛이 약간 이상해도 그냥 넘겼고, 그런 날마다 배앓이를 심하게 했다. 그녀는 아, 서준이가 배가 좀 아픈가 보네. 하고는 약을 먹이지도 돌아보지도 돌보지도 않고 강준과 함께 TV를 봤다.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려 안 그래도 두통이 심한 머리가 울려서 귀를 막았지만, 소음차단 헤드셋을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어린 애의 팔 힘과 그 지속시간이란 한계가 있었다. 시끄러워, 중얼거리면서 어렴풋이 알았다. 엄마가 뭔가를 했다. 


인스턴트가 좋았다. 안전했다. 끓이지 않은 라면이라도 엄마가 주는 것보다는 확률상 안전했다. 엄마가 차려준 음식은 깨작깨작 먹는 척만 했고, 그녀는 이럴 거면 왜 배고프다고 했어? 라면서 그릇을 깰듯이 싱크대로 던졌다. 그녀가 안방으로 사라지면 찬장에서 서준은 몰래 라면을 꺼내 부숴먹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굴이 좋아졌다. 세제로 위장을 고문 안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라면에는 노란색 비타민으로 불리는 리보플라민도 들어가고, 건조식품이라 방부제도 들어가지 않고, 라면의 발명가 안도 모모후쿠는 매일 라면만 먹다가 96세에 세상을 떠나는 부작용을 얻었다는 밈이 돌아다닐 정도로 생각보다 영양적으로 나쁘지 않다. 그 어떤 음식이든 세제첨가품 보단 낫다. 전략을 바꾼 뒤로, 비실비실하던 서준의 건강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잦은 설사도 멈췄다. 그래서 서준에게 있어 안전하고 그립고 몸에 좋은 음식은 ‘엄마 손맛’이 아니라 라면이었다. 


이 때문에 살면서 위화감을 느낄 상황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엄마 손맛을 ‘엄마가 살아 계실 때도 찾고, 돌아가신 후에도 찾는 맛’으로 기억했다. 아플 땐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음식이 생각이 난단다. 고생할 때, 긴 여행에서, 삶이 지치고 고달플 때 생각나는 맛이란다. 길 가다가도 그런 간판이 흔했다. ‘집밥생각’, ‘엄마반찬’,’어머니의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배달 음식이 맛있으면 게시판에 이렇게 썼다. ‘배달 음식이 아닌 것 같다. 친정 엄마가 만들어준 것 같은, 정성이 대단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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