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어야겠다.
주이는 17년 동안 다녔던 직장을 처음으로 휴직했다. 둘째 아이 민서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덜컥 1년 육아휴직을 낸 것이다. 큰 아들 민준이 입학하던 해에는 회사가 눈코뜰 새 없이 바빠 눈치를 보느라 휴직을 못 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사와 육아, 학부모 노릇에 바쁜 회사일까지 겹쳐, 어른은 좀처럼 걸리지 않는다는 폐렴 바이러스에 감염돼 한 달 내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주이는 둘째 아이가 입학할 때는 반드시 휴직찬스를 사용하겠노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육아와 일에만 매진했던 지난 십 수년에 대한 보상으로, 적금과 비상금을 몽땅 털어 마음속에 간절히 품은 꿈을 이뤄보기로 마음먹었다.
직장 선배가 추천한 책을 새벽 내내 다 읽은 주이는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리셋하기로 결심했다. 휴직과 동시에 스물셋에 워킹홀리데이를 보냈던 호주 시드니로 아이들과 배거본딩*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배거본딩: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닌, 최소 6주 이상 긴 시간을 들여 세상을 유랑하는 여행 전통) 진혁은 갑작스러운 주이의 결정이 터무니없어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며칠에 걸쳐 진혁을 설득했다.
“내가 시드니 길도 다 알고, 숙소도 진짜 저렴하게
알아봤어. 게다가 1-2월은 스쿨홀리데이 기간이라
아이들 체험도 많아 캠프에 보낼 수 있어. 방학 내내 집에 있어봐야 학원비 밖에 더 들겠어? 마침 내가 결혼 전부터 들어 둔 적금도 만기라 그 돈으로 다녀올까 해. 자기한테 손 벌리는 일은 없어. 이건 나와 아이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야.“
진혁은 주이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다. 돈을 달라 조르는 것도 아니고,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도 아니다. 해외경험은 여러모로 비용부담이 있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인 것은 진혁도 동의했다. 다만 걱정인 것은 아빠도 없이 타국에서 생길지 모르는 아이들의 안전 문제인데, 주이는 예전에 알던 지인이 현지에 정착해 살고 있으니 만약의 사태가 생겨도 도움을 청할 곳이 있어 그 또한 걱정 말라고 했다.
마침내 주이는 수개월의 준비 끝에 호주로 떠났다. 아이들이 현지 캠프에 참여하는 동안 주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넉넉히 가졌다. 취업과 결혼이 부여한 책임과 의무로부터 십수 년 만에 해방감을 만끽했다. 이것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월급을 가치 있게 쓰는 거라 여기며 두 달의 시간을 꾹꾹 눌러 넘치게 썼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자기야, 인생은 단 한 번뿐인데,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내가 왜 호주에서 두 달만 있다가 온다고 했을까? 좀 더 있다 올 걸...“
"왜 없어? 돈만 있으면 다 하지. 요즘에 뭐 좀 하려면 월급 가지곤 택도 없어. 월급만 빼고 다 올랐잖아. 게다가 자기는 휴직기간이라 월급도 거의 안 나오는데. 이제 현실을 직시해. 꿈은 그만 꾸고 일어나시죠. 최주이 씨?"
진혁은 호주여행 후유증을 호되게 앓는 주이를 꾸짖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따가운 그의 호통에 호주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주이의 열정이 슬쩍 꽁무니를 뺐다.
"돈이라...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더 벌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구나. 돈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호주에 더 있다가 오는 건데."
"내가 왜 그렇게 재테크가 중요하다고 노래를 불렀는지, 이제 알겠어?"
"지금은 애들이 많이 커서 학비며 식비며, 애들 앞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많아져 그렇지. 우리 집 엥겔지수가 좀 높아? 왜 이렇게 돈 들어갈 데가 많은 건지... 휴...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돈이 나는 걸까?"
"김 과장 알지? 젊을 때부터 안 쓰고 모은 덕에 지금 자기는 전세 살면서 임대료 받는 건물이 세 채나 있대. 엊그제 대학 후배랑 통화했는데 몇 년 전에 산 비트코인이 지금 1억까지 올라서 차 바꾼다더라. 남들은 잘도 하는 그걸 나는 왜 못했는지... 종잣돈이 최소 1-2억은 있어야 투자도 한다는데. 아휴...
남편의 깊은 한숨과 신세한탄에 주이는 공연히 호주에서 쓰고 온 돈으로 투자를 했어야 하나 마음이 납작해졌다. 가치 있게 쓴 돈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행복이 뒷걸음질 치는 기분이었다.
마침 세탁 종료 알림음이 울렸다. 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탁기로 향했다. 세탁기 문을 열고 탈수된 빨래들을 꺼내 라벤더향이 나는 시트를 한 장 뽑아 함께 건조기로 밀어 넣었다. 자잘한 양말들을 수고롭게 일일이 널지 않아도 되는 빨래건조기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는 또 어떤가? 그들이 없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건조기 문을 닫고 버튼을 누르니 '띠리링'소리와 함께 건조기가 힘차게 돌아갔다.
"건조기가 빨래 다 말려주지, 외출하고 돌아오면 로봇청소기가 다 청소해 주지... 돈도 이렇게 모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호주에서 갓생 살고 있는데 계좌에 잔고는 차곡차곡 쌓이는 그런 방법? 후훗."
"돈이 돈을 벌려면 종잣돈이 많아야지. 근데 자긴 호주가 그렇게 좋아? 호주에서 갓생?“
"솔직히 살고 싶진 않아. 모국어가 아니니 살기는 당연히 우리나라가 훨씬 편하지. 근데 가끔은, 원할 때면 언제고 머물고 싶어. 시설도 아이들 위주로 잘 돼있고, 사교육 천지인 한국을 떠나서 비치나 공원에서 마음껏 뛰놀게 해주고 싶고. 공기는 또 얼마나 좋은데? 비염약 잔뜩 챙겨 갔는데 한 번도 안 먹인 거 알지? 그 나라 사람들... 진짜 축복받은 거야."
"우리나라 미세먼지 생각하면 호주가 공기 좋은 건 진짜 부럽다."
"공기가 얼마나 좋냐면 한 달 내내 숙소에 창문을 열어놨는데 테이블 위에 먼지 하나 안 쌓이더라고, 발코니에서 뻥 뚫린 먼 곳을 바라보면 공중에 가릴 게 없으니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공항도 또렷하게 보인다니까?"
"우리 집은 3일만 문 열어놔도 먼지가 수북이 쌓이던데. 호주 공기가 진짜 깨끗하긴 한가 보네."
"천국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신세지. 그 좋은 곳을 놔두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신이 나한테만 '세상이 5년 뒤에 종말 할 것이다'라고 말해준다면 난 집이며 차며 모든 걸 정리하고 호주로 떠날 거야. 후훗."
주이는 양손을 부여잡고 허공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세상이 5년 뒤에 종말 하는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이민 가서 사는 게 아니라면 아이들 데리고 휴직했을 때 좀 더 있다 오는 것도 괜찮지. 돈만 있으면. 근데 이제 현실을 좀 직시하고 이럴 때 운동도 하고, 직장 다닐 때 못 해본 것들 좀 해 봐."
"아니야. 나는 돈을 벌어야겠어."
주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혁은 피식 웃었다. 돈 버는 게 결심만으로 이뤄지는 일인가. 그는 주이가 휴직하는 동안 그저 잘 쉬기를 바랐다. 그동안 쉬지 않고 육아와 일을 욕심낸 아내가 가여웠다. 회사에 있을 시간에 좋아하는 독서도 실컷 하고 엄마들끼리 브런치 카페에서 만나 정보도 교환하는 평범한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그러나 주이의 머릿속 사정은 진혁과 달랐다. 호주에 다녀온 지 2주밖에 안 된 그녀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 잡혀 있었다. 휴직한 12개월 중 호주에서 보낸 2개월을 빼면 이제 10개월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 다시 호주에 갈 수 있다.
'부자가 되는 방법? 그건 절대 비밀이 아니잖아? 전 세계 부자들이 베스트셀러에다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걸?'
주이는 육아로부터 퇴근한 시간이면 밤이고 낮이고 재테크 서적부터 자기 계발 서적들을 파고들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의 공통점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엠제이 드마코는 그의 저서 <부의 추월차선>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Inventor(발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필요로 하지만 세상에 아직 없는 유일무이한 것을 찾아야 한다. 주이는 이 지점에서 뭔가가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났다.
'바로 이거야!'
주이는 호주에서 할 수 있는, 세상에 아직 없는 유일무이한 무언가를 떠올렸다. 직선을 그리던 그녀의 평범한 인생이 미묘하게 휘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