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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Feb 18. 2024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자

또다시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고


주이는 어릴 때부터 전을 잘 부쳤다. 손이 빨라 재료도 뚝딱 준비해 섞고, 프라이팬 위에서 반죽을 다루는 손놀림은 수준급이었다. 뒤지개와 숟가락만 있으면 팬 위의 반죽을 납작하고 먹음직스럽게 잘 만들었다. 튀기듯 부치다가 신속하게 뒤집은 뒤 더 바삭해지도록 꾸욱 눌러 먹음직스럽게 그을렸다. 어릴 적 주이는 살던 동네 이름을 딴 ‘진월동 전순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주이의 엄마는 딸이 시집갈 때 명절에 전 부칠 사람을 빼앗겼다며 눈물을 훔쳤고, 주이의 시어머니는 전을 뚝딱 부치는 며느리를 얻었다며 아주 흡족해하셨다.


주이는 몇 날 며칠 자기 계발서를 정독하며 '상위 25% 이내의 재능에 끈기가 더해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성공 공식을 깨우쳤다. 스스로 전 부치는 능력이 상위 5%는 거뜬히 될 거라 판단했다. 이제껏 자신만큼 전을 잘 부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 부치는 능력도 성공 공식에 대입할 수 있을까? 명절 때마다 시어머니를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주위 사람의 입만 즐겁게 해주지 말고, 이 능력이 돈이 되게 해 보면 어떨까?


‘그래, 시드니에 전집을 차려보는 거야!’


주이는 시드니에는 전집이 없고, 이것은 호주살이와 부자 되기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이라고 진혁을 졸랐다. 진혁은 고소하게 부친 김치전을 들이밀며 시드니에 전집을 차려보고 싶다는 아내를 이번에도 말리지 못했다. 남편의 조건부 승인을 받은 주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시장조사가 급선무였다. 인터넷을 빠르게 뒤져 출국 날짜가 임박한 초특가 시드니 왕복 항공권을 구했다. 속전속결이다. 최근 집안일도 회사일도, 이렇게 다급한 이끌림을 갖고 적극적으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9개월 하고도 일주일 남은 휴직 기간이 주이를 더 조바심 나게 했다. 어쩌면 이건 운명일까? 주이는 자신의 운명이 어딘가에 쓰여 있다면,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스토리가 반드시 있기를 바랐다.


차가운 비행기 속 승객들은 시드니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보였지만 주이의 머릿속에는 그들과 차원이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시장조사가 성공하면 휴직기간 동안 시범적으로 전집을 운영해 보고, 사업이 번창할 가능성이 보이면 과감히 사직서를 낼 생각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좌석 앞 간이 테이블을 내렸다. 가방에서 꺼낸 노트 표지에 <시드니전집 프로젝트>라고 네임펜으로 큼지막하게 썼다. 시드니로 향하는 하늘 길 위에서 이 노트는 빼곡하게 채워질 것이다. 판매할 전 목록과 설명, 재료, 가격 등이 포함된 메뉴판 아웃라인을 그렸다. 전집을 차리기 위해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지, 포장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게 가장 좋을지 생각 나는대로 적어 나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집을 차릴 상가다. 곧 시드니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상가에 대한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전집을 차려야겠다고 결심이 서니 못할 이유도, 안 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정 돈이 부족하면 마이너스 통장과 퇴직금 정산이라는 카드도 있지 않은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으로 주이는 깜깜한 하늘에 전집을 차리면 해 보고 싶은 일들을 뭉게뭉게 그려 나갔다.


'가볍게 한 끼 때우기 좋은 크기, 식감 좋은 두께로 만들어야지. 그리고 예쁜 포장지를 준비하자. 선물용으로 마음에 쏙 들거야, 고소한 전 냄새가 시드니 시티를 진동하게 만들 거야.

2호점, 3호점 문의가 오면 컨설팅비는 얼마나 받아야 할까?

3개 이상 포장해 달라고 하면 할인도 해줄까?

SNS에 홍보 문구를 뭐라고 올리지? 전집 이름을 영어로 지을까?

위치는 실내보다는 야외가 낫겠지? 바깥에 간이 의자와 휴지통도 준비할까? 물티슈랑 키친타올도 챙겨야지.

외국인 손님들이 내 전을 먹고 “Awesome!”, “Incredible” 말할 때 나도 능수능런하게 받아치려면 영어공부 좀 해야겠는데?

갑자기 손님이 몰려서 줄이 길어져도 나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생은 외국인으로 써 볼까? 아니지, 소통이 답답하면 불편할 거야. 워킹홀리데이를 온 학생이 좋겠다. 딜리버리도 하면 좋겠는데?

전집이 잘 되면 내가 우리나라의 전을 홍보하는 멋진 홍보대사가 될 것 같은데? 사람들이 전집에 왔다가 SNS에 입소문 내주면 유명해지지 않을까? 아니다, SNS 후기 이벤트도 해야겠구나! 이러다 한국정부에서 표창장이라도 받는 것 아냐? 잘하는 일로 돈도 벌고 애국도 하고 일타쌍피 일거양득이 아니고 뭐겠어.'


빽빽한 콩나물시루처럼 비좁은 좌석은 주이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선 이미 한국을 빛낸 애국자가 되어 퍼스트클래스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계획들을 그려내느라 10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 채 시드니 상공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걷히는 구름 사이로 시드니 대륙이 눈에 들어왔다. 주이는 노트 맨 마지막 페이지에 필사해 둔 문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 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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